못 말릴 집념의 사내
  • 경북도민일보
못 말릴 집념의 사내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0.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 시 종 (시인)  왜 사는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릴 것 없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산다고 대답하리라. 당신은 무슨 의문이 그리도 많으냐고 반문해도 나는 확실히 의문이 많다고 대답할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태어나신 것이 1916년경이다. 1931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전부가 구식 결혼으로 신부집 마당에서 행례가 거행되었다. `결혼사진’이란 아예 단어조차 없었다. 20대가 되도록 사진 찍을 기회가 전혀 없는 `문명실조’시대에 사셨다.  1942년 초 유복자로 낙지(落地)한 필자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아버지는 만 25세로 낙명할 때까지 사진 찍을 기회가 한두번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작 남긴 사진은 증명사진 한 장도 없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점촌장로 교회에 잠깐 나가셨다고 한다. 3년 전에 `점촌시민교회 70년사(史)’가 발행되었는데 그 책 화보에 1939년에 찍은 교회단체 사진이 실려 있다. 그 사진에는 당 회장 목사님 장로님등 교회 중직과 그 밖의 남녀 장년들과 유년주일학교 아동들이 한 장의 사진 안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사진을 찍던 무렵 그 교회 청년교인이었던 지금은 80대 후반의 지역중진 R장로님께 사진 중에 행여 필자의 선친이 있느냐고 여쭈어 보니 콩알만한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시며 이 분 같다고 알려 주셨다. 심봉사 학규씨가 개안(開眼)한 듯, 나도 평생의문을 해결하여 기쁨을 비길 데가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깐, 곧이어 “나도 하도 오래 전 일이라 확실한지 자신이 없다”는 R장로님의 말씀이다. 큰누나가 여섯 살 때 선친이 돌아가셔서 선친얼굴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아 문제의 사진을 복사하여 큰 누님께 보내 감정케 했더니 사진의 얼굴은 선친보다 늙고 수척하여 첫눈에 아니라고 전화를 해 주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허사라니 맥이 풀렸다. 그러나 쉽게 물러설 내가 아니다. 콩알만한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더니 얼굴이 두툼하고 키가 훤출한 젊은이 사진이 포개져 있어 정밀 조사를 했더니 얼마 전 돌아가신 숙부님과 너무 닮으셨다. 삼촌이 이때까지 살아 계셨다면 선친의 사진임이 확증되었을텐데 너무 아쉬었다.  그러나 그만큼이라도 밝혀진 것은 하느님의 은혜시다. 그 사진을 통해 아버지 생전에 만나셨던 아버지와 동시대인을 본 것만도 무지하게 감사한 일인 것이다. 살아가면서 사진을 자주 찍는 것도 미덕이다. 요즘엔 사람들이 사진 찍는 것은 밥먹 듯 하는데 말이다. 심지어 강아지 백일기념 사진도 찍는 세상이다. 사진을 보면 세상을 아예 떠났거나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도 그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사진을 보면 넉넉히 반벌충은 됨즉하다.  두번째 의문사항(?) 궁금증은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 이름과 신원을 알아내기다. 국민학교 60명의 동기생중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는 학생은 나 말고 한사람 더 있었는데 몇해 전 구룡포읍에 살다가 작고한 서경수 학우가 국2학년 담임이 김 선생님이란 걸 간신히 기억하였고 총평하고 실력있는 엘리트 교사라고 했다. 내 기억도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음악 시간에도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은 대부분 음악에 소양이 없어 음악시간이 되면 다른반 교사와 교환 수업이 성행했다. 우리 학급 담임 김 선생님은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노래지도는 누워서 떡먹기요, 그 당시 동요작곡전집에서 재미있는 곡(曲)을 골라 곧잘 지도하셨다. “우리 동네 차돌이 의원이라오”하는 노래는 감기가 걸려도 약은 무슨 약 따뜻한 물도 제대로 못 마시던 어려운 시대를 살았기에 김 선생님이 가르친 그 노래 한 소절이 지금은 늙은 아동 `고희노옹’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난해다. 우연한 기회에 국2학년 담임 김 선생님과 절친했던 초등교장으로 정년퇴임한 R교장선생님과 설왕설래 끝에 의문의 베일에 쌓였던 국2때 담임선생님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 이름을 거의 5~60년을 추적하던 국2학년 담임이 김성태(金性泰)선생님임이 밝혀졌다.  문경군청 사령원부에도 문경교육청 사령부에도 점촌초등학교 사령원부에도 김성태 선생님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제자였던 아동들이 김성태 선생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것은 김 선생님이 2학년 1학기 때 교직을 그만 두고 단기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를 하여 얼마 뒤 임관이 됐기 때문이었다.  고난도의 교련을 국민학교 2학년생에게 가르쳤다. 교사로 있으면서 장교의 꿈을 아동들에 강요(?)한 것이 아닐까. 평소 국2때 담임이 누구인지 모르는 국교동기 장인섭 학우에게 국2때 담임이 김성태 선생님이라고 알려주니 “나도 이제 생각난다. 그 선생님, 대단히 못됐었다” 오래된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안쓰럽다. 김 선생님은 아동들에게 밥은 안 주면서 `밥통 같은 놈’이란 비하를 자주 하셨다. 나도 국2때 김 선생님께 많이 시달렸지만 그 이름을 기억한 똑똑한 아동 2명에 내가 포함되었다.  억지로라도 김 선생님께 감사해야 할 일은 가장 가난한 집 아들인 김시종의 자리 옆 짝으로 당시 점촌의 고위층인 점촌역장님의 영애, 달덩이 같은 안순자를 앉혔다. 김 선생님은 교직 사퇴 뒤에 군에 입대, 고속 승진되어 소령시절인 1951년에 포로가 되어 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으셨다고 한다. `밥통’타령하던 어른이 굶어 죽다니…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