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 경북도민일보
송구영신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0.12.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는 지고/ 귀뚜라미는 운다./ 일꾼들은 한 바늘씩 하루 위에 실마리를 맺었다./ 얕은 풀에는 이슬이 맺히고/ 황혼이 나그네처럼/ 모자를 정중히/ 한 쪽 손에 들고서/ 자고 가려는지 발을 멈췄다./ 끝없는 어둠이 이웃 사람처럼 다가오고/ 얼굴도 이름도 없는 지혜가 오고/ 동서반구의 그림과 같은 평화가 오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미국 천재시인들 중의 한 명으로 곧잘 꼽히는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1886년)의 시 `귀뚜라미는 울고’ 전문입니다.
 풍경화 같은 이 서정시 한 편을 기억 저 밑바닥에서 불러내 봅니다. 오늘이 2010년의 그믐날이어서이지요. 이 시를 외웠던 중학교 때부터 매년 그믐날이면 되풀이 해오는 개인적 습관이기도 합니다. 제야의 서정을 노래한 시도 아닌 이 작품에다 무연한 세모(歲暮) 서정을 의탁해온 까닭은 스스로도 모릅니다. 그저 져버린 해, 하루, 황혼, 나그네, 어둠, 평화 같은 시어가 그믐밤의 저 허허롭고 고요한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는 개인적 상념 때문일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다시 이 시를 고즈넉이 암송하게 되는 그믐날을 맞았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365일이었을 거지만, 누구든 간에 이렇다 하게 내세우거나 자랑할 만한 보람이나 성취가 그리 많을 리도 없을 테지요. 언제나 그렇듯 그저 그렇게 지나온 1년이 아니랴 싶습니다. 하지만 이걸 무의미하게 보낸 한 해였노라고 회한에 잠기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래도 저마다 인생의 나이테 하나씩은 더했으니까요. 묵은해를 보내는 마음은 으레 허허롭고 겸허합니다. 더러는 지난해를 반추하며 아쉬움에 젖을 것이고, 또 더러는 보낸 한 해를 토대도 더 나은 새해를 기도하며 제야의 종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자, 이제 디킨슨의 시구처럼 한 해의 실마리를 맺어야 할 시각입니다. 독자 여러분, 동서양의 그림과 같은 평화와 더불어 보내버린 경인년 잘 갈무리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내일아침 호미곶 수평선 저 너머로 이글거리며 솟아오를 신묘년 새해 희망차게 맞이하십시오. 송구영신!  정재모/언론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