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최초로 떠난 안나푸르나에서 자신과 마주하다
  • 이경관기자
생애 최초로 떠난 안나푸르나에서 자신과 마주하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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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환상 방황 - 정유정 지음 l 은행나무 l 303쪽 l 1만4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발밑으로 마르상디 강이 굽이치고 있었다. 에메랄드 빛 물길 위에선 새 떼가 날았다. 협곡을 이루던 암녹색 골짜기들은 강 양편으로 멀찍이 물러앉았다. 잿빛 개흙이 깔린 드넓은 강변에는 동화처럼 예쁜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는 모래밭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단발머리를 팔랑이며 줄 놀이 하는 계집아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68쪽)
 장편소설 `7년의 밤’과 `28’로 한국문학계의 돌풍을 일으킨 작가 정유정. 그녀의 첫 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이 최근 출간됐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이야기 속 세계, 나의 세상, 생의 목적지로 돌진하던 싸움꾼이 사라진 것이었다. (…) 덮쳐오는 허망함에 당혹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누군가 내 상태를 알아차릴까 봐.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될까 봐. (…) `나 안나푸르나 갈 거야’ 선택사항이 아니야. 생존의 문제라고.”(16쪽)
 그녀는 지난해 소설 `28’을 탈고한 뒤, 무기력해진 자신을 마주하고선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곳은 그녀의 소설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 승민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한 신들의 땅, 히말라야다.
 “산이 아니라 대자연의 정령과 맞대면한 기분이었다. 내가 허락한 자만 나를 통과해 갈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 단단히 마음먹고 들어오라고.”(42쪽)
 그녀의 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녀에겐 여권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타공인 심한 길치였다. 그런 그녀를 잘 아는 남편은 홀로 떠나는 여행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녀는 결국 여행 메이트로 후배 소설가 김혜나를 낙점하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은 활기찬 목소리로 “나마스테” 인사하며 우리를 스쳐 갔다. `당신 안의 신께 경배 드립니다’라는 뜻이라고 검부가 알려주었다. 내 안의 신이라고……. 총총 뛰어가는 갈래머리 소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네 가슴에는 어떤 신을 품고 있는지. 너를 달리게 하는 태양? 네 뒤를 비춰줄 달? 네 길을 인도하는 별? 난데없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43쪽)
 그녀는 여행메이트인 김혜나 작가와 현지 가이드, 짐꾼과 함께 17일간의 히말라야 환상종주를 시작한다.

 네팔 히말라야 산맥 중부 안나푸르나 영봉을 끼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 바퀴 도는 코스. 그들이 선택한 코스는 일반인들도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고 고도가 높아 고산병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여행은 녹록치 않았다. 흐린 날씨, 고산병 초기증상인 두통과 감기, 몸에 맞지 않는 음식과 웃지 못 할 변비까지.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를 끼고 도는 `환상종주’는 어느새 갈 길을 잃은 `환상 방황’이 돼버린다.
 자연은 찬란한 자신의 모습을 결코 쉬이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름다운 산과 굽이치는 강, 봇짐을 짊어진 나귀 떼의 방울소리, 양 갈래 머리의 소녀들, 별이 총총이는 하늘로 그간의 우여곡절을 보상 받았다.
 “이제 와 나는 울고 싶었다. 어머니가 떠났던 오늘, 이국의 쓸쓸한 강가에서 뒤늦게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그러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이 두려움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지 않으면 고꾸라진다는 두려움, 고꾸라지면 죽는다는 두려움으로부터.”(142쪽)
 여행기 속 툭툭 쏟아지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풍경과 함께 어우러져 먹먹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 평생을 짓눌러온 넘어지면 안된다는 부담을 내려놓으며 진정한 자신과 마주한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해왔다. 죽는 날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푸르나의 답이라고 믿고 싶었다.”(186쪽)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의 삶은 여행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살기 위해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몰 것이다.
 대자연 앞에서 더없이 작아지며 그 작아짐으로 행복했던 그들의 히말라야 환상종주. 그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터벅터벅 묵묵히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보면 광활한 히말라야가 보일 것이라고.
정유정. 은행나무. 303쪽.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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