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상실, 공허 끝에 마주한 삶의 재생력
  • 이경관기자
이별과 상실, 공허 끝에 마주한 삶의 재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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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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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작가 네번째 장편소설

 

끝의 시작
서유미 지음 l 민음사 l 176쪽 l 1만3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이별을 말하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다. 변한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남자의 담담한 말 한마디는 먹먹하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아스라이 스러지는 사랑은,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
 “봄날 오후는 박제된 것처럼 여전히 거기 있었다.”(31쪽)
 문학수첩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한 서유미 작가. 그녀의 네 번째 장편소설 ‘끝의 시작’. 이 소설은 벚꽃이 핀 봄날, 제각각의 상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꽃이 진 뒤 풍경 속에 남은 것들은 애틋하다.
 “영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엄마는 손에 닿는 것이 놓쳐 버린 세월, 붙잡고 싶은 삶이라도 되는 양 셔츠를 입은 영무의 가슴팍을 꽉 그러쥐었다. 가능하다면 영무는 자신의 시간을 뚝 떼어 주고 싶었다.”(24쪽)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영무의 엄마는 인간답게 죽고 싶다며 치료를 거부한 뒤, 하루하루 저물어갔다. 영무의 엄마는 죽음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메말라가는 자신의 몸을 치장했다. 매니큐어를 바르며 손·발톱을 단장하고 빨간 립스틱을 입술에 발라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냈다.
 영무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 매일 무너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관계가 소원하던 아내는 어머니의 투병 소식을 알리던 날 이혼을 통보했다. 그는 엄마의 죽음까지 이혼을 유예하자고 말했다.
 “부자라고 다 같은 부자가 아니라 다양한 특징과 세부 사항에 따라 등급이 나뉘듯 가난한 사람들도 제각각의 방식으로 가난했다. 왜 1년은커녕 6개월조차 온전히 자신에게 투자할 수 없는지 말로 풀어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38쪽)
 빚 문서 같은 졸업장을 들고 사회에 나온 소정은 이 시대 청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대기업 정규직을 위해 졸업을 미루고 취업 준비를 할 여유도 없던 그녀는 3개월짜리 인턴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의 미안해,는 반성과 개선의 의미를 담은 사과가 아니라 몸을 숨기고 도망가기 위한 바리케이드일 뿐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서 옆을 돌아볼 줄 모른다는 건 알지만 그 말은 같이 사는 사람을 외롭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86쪽)
 홀로 뜨겁게 영무를 사랑해 결혼까지 하게 된 여진. 그녀의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영무와의 결혼생활은 죽은듯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때 기적처럼 생긴 아이는 무리한 일과 스트레스로 유산됐다. 그녀는 결국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버지가 떠오를 때마다 영무는 감정과 사람에 대해 냉담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갈등에 대해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그가 흔들리는 걸 눈치채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에 대해선 많이 자유로워졌으나 어떤 상황 앞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뛰어들고 싶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자신을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104쪽)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던 영무, 그에게는 말하지 못할 유년 시절의 상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얀 약통에 든 약을 먹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지만 홀로 남은 엄마 앞에서 힘들어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감정이란 벽에서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진수에게서는 밤이 깊도록 연락이 없었다.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고 어떤 사랑은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 모든 걸 사랑이라고 불러야겠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137쪽)
 희망이라고는 없는 소정의 삶에도 한줄기 빛은 있었다. 남자친구 진수였다. 그는 가난의 짙은 그림자에 쌓인 소정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나 만나면서 마주하는 환경 차이 앞에서 그와의 관계는 흔들렸다. 취업 준비로 바쁘다던 그를 벚꽃 축제가 한창이던 여의도 윤중로에서 마주쳤다. 그의 옆에는 긴 머리에 앳된 여자가 있었다. 긴 머리의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해사했다.
 “이별의 순간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168쪽)
 유산의 아픔으로 죽어가던 여진은 살기 위해, 미용실을 인수해 그곳을 도피처로 삼으며 하루하루 버텨갔다. 어느 날 그녀는 미용실을 찾은 연하의 대학생 석현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밤을 보내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 시간들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진 어느 날 영무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소정은 진수와 헤어졌으며 여진 또한 석현과 이별했다. 그렇지만 꽃이 진 자리를 녹음이 대신하듯 그들의 상처에도 새살이 돋아났다. 소정은 정규직에 1차 합격하고 영무는 비로소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여진은 오롯이 홀로 서는 법을 배웠다. 이별과 상실, 공허 끝에 마주한 삶의 재생력은 희미했지만 결코 끊이질 않았다.
 4월, 누군가는 이별을 한다. 그 차가운 이별이 더욱 찬란하게 느껴지는 것은 벚꽃이 눈부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처럼, 사랑하는 누군가와 이별한 당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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