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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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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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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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래 수필가
[경북도민일보] 그때도 가을이었다.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자대에 배치된 다음 날 전역하는 W병장은 예비군복을 입고 ‘편지’라는 제목의 유행가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그때는 3년으로 정해진 내 군대생활 시작 무렵인지라 손을 흔들며 연병장을 가로질러 위병소로 걸어가는 모습은 별로 부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없이 건네주고’로 시작되는 노래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제대한지 4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편지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매체였다. 만나서 직접 말하기 쑥스러운 우정이나 사랑의 고백도 편지로는 가능했다. 침으로 우표를 붙인 봉함편지를 빨간 우체통에 넣고 돌아서면서 큰 가방을 맨 우편배달부가 들고 올 답장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랬던 시절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젠 세상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편지가 사라질까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휴대폰 문자기능을 비롯하여 페이스북이나 카톡과 같은 SNS기능이 단지 안부를 묻는 기능을 대신하고 있어 속마음을 전하는 수단이었던 편지를 사라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섭씨 40도를 육박했던 금년의 더위는 정말 유난했다.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소나기를 몰고 온 말복을 지나면서 완전히 기가 죽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뒤돌아보니 에어컨을 켜놓고 잠을 청하다가도 부채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던 날이 언제 있었던가 싶다.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결에 가을 냄새가 묻어오는 오늘 같은 날은 편지를 쓰고 싶다.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한다. 지난 여름 무덤 속은 또 얼마나 더웠을까. 수취인의 주소가 정확하지 않아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부모님에게 무사히 여름을 보내고 성숙한 가을을 맞았다는 자식의 소식을 전하고 싶다. 다음은 일찍이 홀로 된 누님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고된 시집살이보다 초가삼간 친정집 울타리에 줄지어 피었던 봉선화가 그리워 눈물을 찍었다고 하던 누님의 청춘은 이 가을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시집가고 장가들어 멀리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오늘만은 휴대폰 아닌 장문의 편지로 가을 소식을 전한다.
 부모님이며, 누님이며, 아이들에게 보낼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누웠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는다. 가을이라 그런가. 그래. 열 번도 더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던 시골 소년의 풋사랑 고백서가 있었지. 그 편지가 전해졌다면 결혼으로 이어졌을지 알 수 없는 참으로 예뻤던 단발머리 소녀 분이. 윗마을로 시집가 할머니가 되어 있을 분이의 근황이 궁금하긴 하지만 차마 편지를 쓸 수가 없다. 이 가을 풍문에 무슨 소식이라도 들려올까?
 분이 생각은 그쯤에서 접고 일어나 다시 펜을 들었다. 가을의 시작점에서 꼭 쓰고 싶은 편지가 생각났다. 풍성한 수확을 위하여 무더위를 감내해온 자연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늘만큼 큰 행운이 아니라 내 몸에 맞춤한 크기의 행복을 준 세상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답장이야 없으면 또 어때. 넓은 가슴 열고 다가와 말없이 손 내미는 은은한 달빛으로 충분하지. 은하수 기울어가는 새벽, 내 방 들창을 가볍게 흔들어주는 달콤한 바람 한 자락에 만족할 작정이다.
 가을이 손짓하고 있다. 이 가을엔 존경하는 사람, 고마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 혹 원망하고 미워했던 사람 있다면 그에게도 마음이 담긴 편지를 쓰자.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 보낸다’로 끝나는 노래를 남기고 병영을 떠났던 W병장의 안부가 갑자기 궁금해지는 계절이다. 가을,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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