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는 가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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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는 가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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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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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래 수필가
[경북도민일보] 가을엔 무작정 떠나고 싶다. 발 닿는 곳 어딘들 행복하지 않으랴. 혹여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이미 다녀온 여행지에서의 멋진 한 때를 회상해 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 다녀왔던 북유럽 여정 한 자락을 펼쳐본다. 그 곳에서 일 년 사계절 중에서 가을을 뺀 나머지 세 계절을 한나절에 보았다. 터져 나오는 탄성을 도저히 자제할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떠나지 못하는 가을날을 보상받고 싶다. 
 창밖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스키장이며 리조트들이 들어선 마을을 통과하던 버스가 갑자기 멈췄다. 폭설 때문에 길을 통제하고 있어 목적지를 향해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한다. 5월 말에 내리는 폭설 덕분에 큰 호수를 덮은 희미한 안개, 깨끗하게 정비된 도로와 주택, 빽빽하게 들어선 푸른 숲과 작은 들꽃들이 인상적인 도시 릴리함메르(Lillehammer)를 거쳐 저녁 무렵에야 와달(Wadahl)에 도착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깊은 강물 위에 노을이 붉다. 강뚝에 늘어선 자작나무에 봄이 도착해 있다. 보온을 위하여 풀을 잔뜩 심어 키우고 있는 지붕 너머로 설산이 보인다. 그냥 잠들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밤을 밝히는 아침 눈 덮힌 산봉우리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다시 출발하였다.
 버스는 장티푸스가 마을을 휩쓸어 주민 몇 명만 살아남았다는 마을을 지나 산으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계곡이 너무나 웅장했다. 눈앞에 펼쳐진 계곡의 넓이며, 저편 산까지의 거리가 얼마쯤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함박눈으로 변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오를수록 자작나무 연둣빛 이파리들이 줄어들더니 마침내 앙상한 가지만 떨고 있는 겨울풍경이 이어졌다.
 저 멀리 큰 바위들만 검게 나타났다가 사라져갈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버스는 희끗희끗 보이던 것들을 남김없이 뿌리치고 사방이 완전히 하얗게 변한 눈 속을 씩씩거리며 올라가고 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아래 깔아놓은 열선이 일 년 내내 오는 눈을 녹여주고 있다고 한다. 찻길 양 옆으로 만들어진 눈 절벽 사이를 질주할 수 있는 의문이 풀렸다. 눈, 눈, 눈……. 이렇게 많이 쌓인 눈을 본 적이 없다.
 높이 1000m 정상을 지난 버스는 다시 굽이 길을 내려간다. 갈짓자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아예 ㄹ과 ㄹ이 연속으로 길게 이어진 길이다. 1시간정도나 내려왔을까.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며 산 아래로 봄풍경이 전개된다. 자작나무 가지에 연두색 이파리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진눈개비가 오는 길옆에 버스가 멈췄다. 머리 위로는 설산이 하늘을 가린 겨울인데 바로 옆에는 연둣빛 이파리가 피어나는 봄이다.
 그 뿐 아니라 저 아랫마을에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푸른 산자락 끝이 큰 호수에 잠겨있다. 호수에 크루즈선 두 척이 떠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호수가 아니라 해발 0m 바다였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다시 깊이 수백 미터의 검푸른 바닷물이 일렁이는 ‘게이랑에르피요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봄바람 맞으며 숙소를 나섰다가 끝없는 만년설 속에 풍덩 빠졌었다. 눈길을 더듬어 나오니 자작나무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봄인가 했는데 어느새 짙푸른 여름이었다. 비가 흩뿌리고 있는 페리의 갑판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 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던 짙은 안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산을 넘어온 한나절 3계절이 꿈처럼 스쳐갔다.
 북유럽의 가을풍경이 기억에 없다. 피요르드를 향하여 설산을 넘던 길에 가을만 만나지 못했다. 그 곳의 가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도 어찌 여기만 하랴. 만산홍엽으로 물든 우리의 가을 풍경을 생각하며 단꿈에서 깨어난다. 가을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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