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우리 선친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시 사동 14번지로 되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후 선친은 “황금 두덩어리와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 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바로 금주·금연을 실천하면서 사재를 헌납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한 오산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받은 수의사자격증”을 들고 흥남부두에서 철수하는 미군의 군함을 가까스로 타시고 월남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얼마 전 흥행한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처럼 6남매의 장남인 선친이 10살난 막내와 같이 피난하였는데 그만 흥남부두에서 군함을 타다가 막내의 손을 놓쳐서 어린 막내를 잃어버리고 혼자 월남하시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선친의 집안은 평양에서 내노라하는 부자였는데 조부께서 선친보고 “너 먼저 남한에 막내와 같이 내려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라. 내가 곧 식솔들을 이끌고 내려가마”라고 하시어 월남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해안을 빙돌아 인천부두로 하선하여 형세가 나아지면 바로 다시 이북으로 넘어가서 조부와 형제남매들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북과 가까운 경기도 강화에 기거하셨다.
강화에는 1.4 후퇴이후 민간인으로 조직된 ‘강화특공대’가 공산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며 유격대원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싸웠는데 선친이 유격대원들의 말이 질병에 걸리거나 다치게 되면 상처를 치료하고 질병을 치유시켜 수의사로서 인정을 받았고 유격대원 중 소중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후 휴전이 되어 더 이상 이북으로 가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져서 강화가 고향인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여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 온 후 지금의 동물병원인 가축병원을 운영하시게 되었다.
그 후 1983년 KBS방송국에서 이산가족찾기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전 국민을 울렸고 우리 가족도 혹시나 우리 선친을 찾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도 방송에 나가야하나 하고 흥분도 하고 온 종일 TV앞에서 고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친도 작고하신 상태라서 방송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그만 KBS방송국 건물 벽면에 계단에 바닥에 수 십장의 광고만 붙이고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후 22년이 지났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다시금 국민들에게 이산가족의 아픔을 알리면서 분단되어 있는 동족간의 아픔을 알려주었다.
최근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있었다.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도 가슴에 짠하게 와닿았지만 지금도 그 아픔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은 납북어부가 20년만에 늙은 모습으로 어머니와 상봉하고 작별할 때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헤어지는 버스안에서 아들을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고 아들은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이 얼마나 가슴아픈 장면인가. 말그대로 겪은 사람만 안다는 말 그대로다.
실제로 이산 상봉 뒤 가족들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대부분이 고령이기 때문인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여 대한적십자사는 다음 달 1일부터 통일부와 함께 이산가족 상봉행사 참가자를 대상으로 후유증 심리 치료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은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분단 65년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 언젠가 통일은 온다고 본다. 통일을 대비하는 정책도 필요하고 준비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러면 우리 국민이 더 정신을 한데 모아서 통일을 조속히 이루고 한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줄 때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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