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사의 풍운아 김영삼
  • 김용언
현대정치사의 풍운아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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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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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전도사·국가부도 무능한 대통령 상반된 평가

[경북도민일보 = 김용언]  한국 현대 정치사는 김영삼(YS)-김대중(DJ) 두 사람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군사독재에 맞선 동지이자 경쟁자로서 민주화를 이루고 차례로 대통령을 역임함으로써 ‘兩金시대‘라는 독특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양김’이 2009년 DJ에 이어 21일 YS가 서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다.
 YS처럼 영욕(榮辱)이 엇갈린 정치인도 드물다. 1954년 만 25세에 자유당 후보로  3대 국회에 당선돼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는가 하면,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인 1992년까지 3·5·6·7·8·9·10·13·14대 의원으로 9선을 기록했다. 현재까지 9선 의원은 김종필 전 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 뿐이다. 영원한 의회주의자인 셈이다. 그러나 YS는 ‘외환위기 초래’라는 불명예를 멍에처럼 지고 세상을 떴다.
 YS는 정치학의 여야 구역과 개념을 무너뜨린 파격의 정치인이다. 정통 야당 유전자를 지닌 그가 군부집권의 상징인 노태우 대통령과 손잡고 3당 합당을 이룸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의 구도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3당 합당 파트너에는 유신의 상징이기도 했던 김종필(JP) 총리까지 포함됐다. YS는 그 ‘대담한’ 정치공학으로 대통령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YS의 대통령을 향한 집념은 집요했다.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그의 경남중 재학시절 하숙집 책상 앞에 걸린 글은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었다.  일찌감치 대통령의 꿈을 키운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때는 소설가가 되려 했지만 해방된 뒤 대통령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가 발발, 1951년에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YS의 첫 정치무대는 ‘자유당’이었다. 1951년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1954년 총선에서 그의 당적은 자유당이었다. YS는 그러나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자유당을 탈당했다. 길고 긴 야당 투사의 길이 시작됐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참여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대신 1963년 군정연장 반대 시위에 니섰고 구속됐다.

 ‘투사’의 이미지를 갖춘 그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벌어졌던 1965년 민중당 원내총무를 시작으로 야당에서 대변인 2회, 원내총무 5회를 지냈다. 체급을 불린 YS는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김대중-이철승 씨가 뒤를 이었다. YS는 1차 투표에서 승리했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소석(이철승)계가 DJ를 밀었기 때문이다. YS의 진가가 이 때 나왔다. YS는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승복했다. 야당사와 우리 정치사에 영원히 남을 ‘아름다운 승복’이다.
 1974년 47세 최연소의 나이로 제1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반유신(反維新)’의 기치를 들었다. 1976년 총재 경선에서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에게 패했지만 1979년 5월 다시 당 총재로 복귀했다. ‘중도통합론’을 ‘선명야당’으로 몰아낸 것이다. DJ는 해외 망명길에 나선 상태였다. 71년 대선후보 경쟁에서 YS로부터 양보를 얻어낸 DJ가 총재 선거에서 선명노선을 내건 YS를 밀었다. YS의 반 유신 투쟁은 마침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몰고 왔다. YS는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 이후 총재직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것도 모자라 그를 의원직에서 제명시켰다. 그의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그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로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다.
 ‘문민정부’ 대통령에 취임한 YS의 대담한 도박, 승부수는 더 빛을 냈다. 그의 대통령 취임사는 ‘변화와 개혁’이었고, 그 약속을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였다. 취임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했고, 이틀 뒤인 27일에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17억7822만원)을 전격 공개했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하면서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고 큰소리쳤다. 뒤이어 ‘금융실명제’가 발표됐다.
 대통령 취임 열흘 만에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등 군부 핵심 하나회 세력을 일거에 제거했다. YS의 인기는 90%를 넘어섰다. 95년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분으로 구속했다.
 그러나 YS는 경제에 무능했다. 자식(김현철) 관리에도 실패했다. 97년 초 아들 현철씨가 구속됐고, 기아차 사태 등 대기업 연쇄 부도가 이어지면서 11월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국가부도 상태를 맞았다. 정권도 야당에 넘겨줬다. YS의 최대 오점이다.
 ‘김영삼’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졌다. 전광석화처럼 개혁을 단행한 ‘개혁의 전도사’로 기록될지, 아니면 국가부도 사태를 야기한 무능한 정치인으로 평가될지 역사의 평가가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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