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골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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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골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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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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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래 수필가
[경북도민일보] 이번 가을, 단풍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비록 연일 내린 비로 낙엽이 졌지만. 노란 단풍이 엽서처럼 내리던 날, K시인은 내게 전화를 해 팔공산 수태골의 아름다운 단풍에 대해 이야기했다.
 K시인이 있는 팔공산 수태골은 지난 여름에 갔을 때는 처마에 닿을 만큼 자란 파초 잎이 키를 자랑하고 있었고, 마당 한 쪽에는 감나무 가지가 땅에 닿을 듯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화를 받고 득달같이 달려갔더니 진홍색으로 익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감들이 전신을 흔들며 환영인사를 해주고 있었다.
 K시인은 감 같은 얼굴로 반색하며 나를 맞았다. 처음에는 장대 끝에 감나무 가지를 끼워 꺾어 내리더니 아예 사다리를 놓고 올라섰다. 감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감꼭지를 비틀어 땄다. 금방 채워진 감 박스를 앞에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앉아서 바라보니 팔공산을 넘어가는 노을이 곱기만 했다.
 아들 낳은 기념으로 지게 작대기만한 나무를 구해 심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상기하는 K시인은 감나무가 자기와 동갑이라며 웃었다. 안방에서는 아들을 낳고, 밖에서는 감나무를 심으며 기뻐하던 부모님이셨겠지. 흐르는 세월 따라 감나무도 굵어지고 아들도 나이를 먹어 갔으리. 그 아들이 장성하여 수 십 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하는 사이 부모는 조용히 뒷산에 누웠다. 부모는 거목으로 자란 감나무를 내려다보면서 여전히 아들을 걱정하고 계시리라.
 나는 그날 저녁 아내와 마주앉아 수태골에서 얻어온 감을 깎았다. 감은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고향집 뒤뜰에 자리잡은 두 구루의 감나무는 소년의 유일한 군것질꺼리이자 장난감이었다. 밤사이 떨어진 감꽃으로 목걸이도 만들었고 맛있게 먹었다. 떨어진 풋감을 주워서 나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심심하면 감나무에 올라가 놀았다. 감나무 위에서는 동네가 다 내려다 보였고 오가는 사람들도 좁쌀만하게 보였다. 감나무 위에서는 하늘도 보였다. 현실의 가난을 보면서 미래를 향하는 꿈을 키웠다.
 감나무는 짙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감나무 아래 엎드려 책을 읽고, 숙제를 하였다.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불렀다. 감나무 아래는 공부방이기도 했고, 공연장 무대이기도 했다. 감나무는 삶의 터전이었고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그러나 감나무는 나보다 아버지에게 더 소중한 재산이었다. 껍질을 곱게 깎아서는 처마 아래 대롱대롱 매달아 놓으셨다. 오가며 침만 삼켰을 뿐 감히 하나 먹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은 조상의 제삿상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곶감은 죽은 자와 산자를 이어주는 신령한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깎은 감을 잘게 썰어 말릴 작정이다. 수태골산 감말랭이는 눈 내리는 겨울 저녁 군것질용으로 요긴하다. 감말랭이를 앞에 두고 있으면 백발이 성성해지는 사내도 고향집 감나무 아래에서 꿈꾸던 소년과 만나게 되리라.
 요즘 수태골에는 감나무에 매달려있는 감도 많지만 빈집들도 많다. K시인은 자기가 수태골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염려했다. 그의 염려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내년에도 수태골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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