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일상 벗어던진 정신과 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
  • 이경관기자
위태로운 일상 벗어던진 정신과 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
  • 이경관기자
  • 승인 201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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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김진세 의사 자신에게 처방한 한달의 산책 그려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내게 휴식과 선물을 주어야 하는! 아니, 어쩌면 도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떠나자! 떠나서 일단 피하고 보자. 순례의 고난과 의미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몇 주만 쉬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을 뿐.”(13쪽)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정신과의사가 자신에게 처방한 한 달의 산책을 그린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김진세 의사는 평일 진료에 주말·야간 진료, 20년 가까이 써온 정신의학 칼럼만 수백여 편에 활발한 방송 출연과 강연까지하며 지금껏 별 탈 없이 잘 달려왔다.
 그런 그에게 일에 열정을 쏟아붓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겪게 된다는 ‘번아웃 증후군’이 들이닥쳤다. 꾸준히 해온 아침 운동도 게을리하더니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잦아졌다. 본능적으로 상담 이외의 일은 자제했지만 이내 상담조차 힘들어지고, 급기야 찾아온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사태가 발생했다. 환자들의 힘든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었는데, 그 즐겁고 소중한 상담이 어느덧 귀찮고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버킷리스트로만 간직하고 살아갈 줄 알았던 ‘산티아고 길 순례’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 것은 이래선 안 되겠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이 책은 위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한 정신과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이자, 그 길 위에서 얻은 귀중한 깨달음의 기록이다.
 도피 삼아 시작된 여정이지만 저자 역시 이 길에서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나와 내 주변, 과거와 미래, 사회와 우주에 대해 마음껏 사색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주로 드는 생각이라고는 밥은 무엇을 먹을지, 잠은 어디에서 잘지 등의 원초적인 고민들이라니……. 그도 그럴 것이 환경이 바뀌고 인위적으로 생각을 몰아간다고 해서 순식간에 사색가가 될 수는 없는 법. 저자가 순례길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낯선 환경도 필요하지만, 그와 함께 익숙한 것과 단절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역설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억지로 몰아가지 않음으로써 찾아왔다. 며칠 동안 길과 여정에 집중하다보니 방황하던 마음이 점차 본래의 마음을 찾고 평소에는 알지 못하던 자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정답은 길 위에 있었다.
 “살다보면 남이 잘 안 가는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매너리즘에 빠져 삶이 고달프거나, 삶의 의미를 잃고 그럭저럭 살아갈 때, 가끔은 나만의 길로 걸어봐야 한다. 색다른 길에서 발견한 것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다른 길을 걷는 과정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에우나테의 작은 성당이 다른 어떤 화려한 성당보다도 내 머리 속에 깊이 남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었던 덕분이다.”(62쪽)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혼자만의 여행기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거기에 얽힌 저자의 고민들로 구성돼 있다. 산티아고 길은 그야말로 다양한 상처와 고민의 각축장이다. 재미있는 것은 국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순례길을 걷는 그들 역시 진로와 결혼으로 갈등하고, 정체성과 노년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때로는 사랑에 들뜨기도 하고, 때로는 상실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모두들 길에 질문을 던진다. 길은 직접 응답해주지 않을지라도 많은 이들이 각자의 해답을 안고 돌아가곤 한다.
 1년에 환자를 포함해 1만 5000에서 2만 명과 얘기를 나눈다는 저자는 전공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일반적인 여행에서는 겪기 힘든 깊이 있는 사귐과 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길동무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하며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덕분에 지쳐 있던 자신을 조금씩 추스르게 된다.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들어선 스물아홉째 날, 저자는 여섯 명의 순례자들과 만찬을 가진다. 각자 가장 감동적이었던 일이나 깨달음을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에 저자가 꺼낸 다음의 고백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그가 얻은 것을 압축해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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