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의 망령
  • 한동윤
여전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의 망령
  • 한동윤
  • 승인 20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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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민일보 = 한동윤] 서울올림픽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88년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 한 가정집에 탈주범 4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교도관을 제압하고 탈출한 기결수들이다.
탈주범들은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일가족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하다 10시간 만에 자살 또는 사살되는 유혈극이 벌어졌다. 탈주범 중 마지막 인질범은 최후의 순간 비지스(BeeGees)의 ‘홀리데이’를 들으면서 깨진 유리로 자기 목을 그었다. 다른 인질범들이 총으로 자살하고 총알이 없어 유리로 목을 그은 것이다. 그 인질범이 지강헌이다. 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저주같은 말을 남겼다. 탈주범들이 인질들에게 밝힌 탈주 원인은 10년에서 20년까지 선고된 과중한 형량이다. 지강헌은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라고 항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전경환 씨는 거액의 사기와 횡령으로 당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2년 실형을 살다 풀려났다.
지강헌이 자살하고 28년이 지났지만 그가 말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천형(天刑)처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수백억, 수천억원의 분식회계와 횡령을 저지른 재벌에게 예외없이 내려진 ‘집행유예’ 판결은 ‘유전무죄’의 상징이다.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되고, 구속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보석’으로 풀려나는 것은 ‘유전무죄’의 상징이다. 그 혜택을 받지 못한 재력가와 정치인 등은 국경일 때마다 단행하는 특사로 풀려나기 마련이다. 정치인과 재벌에 대한 제재가 엄격해지면서 ‘가진자’들 사이에서 사법 긴장감이 조성된 건 박근혜 정부 들어서다.

2010년 거액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를 저지른 D그룹 허재호 회장에게 광주고등법원 장모 판사가 허 회장에게 하루 ‘5억원’이라는 ‘황제노역’을 선고한 것은 사법사상 최악의 수치스런 ‘유전무죄’ 판결로 남을 것이다. 더구나 D그룹은 장 판사 소유 아파트가 팔리지 않자 건설사를 통해 매입해준 사실까지 밝혀졌다.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절규는 이 시간에도 전국 법원과 검찰청 주변에서 끊임없이 들린다.
사법부를 향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비난이 쏟아지자 대법원은 판결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이기 위해 2009년 7월 양형기준 제도를 도입했다. 살인, 뇌물, 성범죄, 강도, 횡령·배임, 위증, 무고 범죄 등 7개 유형을 시작으로 점차 확대해 현재 32개 유형의 양형기준이 마련돼 있다.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판사는 피고인 형량을 정할 때 양형기준을 참고해야 한다. 그러나 대법원의 ‘양형기준’은 구속력이 없다. 기준을 지키지 않을 때 판결문에 그 이유를 명시하면 그만이다.
전 두산그룹 B 회장이  모대학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총장 출신 박범훈 대통령교육문화수석에게 3200만원 상당의 뇌물을 건넸다. 박 수석이 청와대에 앉아 J대에 각종 특혜를 베풀어준 대가다. 박 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양형기준은 ‘징역 1년’이지만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이다.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이 범행을 반성하고, 동종 전과가 없고, 3000만원에는 문화예술단체 후원의 뜻도 포함됐다는 점 등을 감경 사유로 들었다. ‘집행유예’를 내리려고 온갖 것들을 끌어들인 인상이 짙다. 박 전 회장에게는 내로라하는 로펌과 변호사들이 달려들었다. 반면 일반 서민들의 범죄에 대한 법원의 ‘양형기준’은 엄격히 지켜지는 편이다. 대법원의 ‘양형기준 제도 시행 이후 연도별 준수율’에 따르면 지난해 화이트칼라 범죄 양형기준 미준수율은 뇌물 범죄 22.1%, 증권·금융 범죄 21.8%, 선거 범죄 22.0% 등으로 집계됐다. 반면 폭행 범죄(3.7%), 교통 범죄(4.9%) 등 일반 범죄의 양형기준 미준수율은 매우 낮다. 서민들에게는 양형기준을 가차없이 적용했다는 증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망국의 범죄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돈과 권력있는 자는 풀어주고, 힘없는 서민들은 엄격히 처벌한다면 그 사회가 온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천형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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