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배신… 변두리의 삶은 무겁고 뜨겁다
  • 이경관기자
권력·배신… 변두리의 삶은 무겁고 뜨겁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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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작가 신작 장편소설, 한국 누아르 찐득한 맛 살려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끈적거리고 뜨겁게 달라붙는 것들을 희수는 이제 사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을 때의 거대한 동공을 희수는 이제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586쪽)
 탄탄한 구성과 서스펜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출간하는 매 작품마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언수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뜨거운 피’가 최근 출간됐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국형 누아르의 쌉싸름하면서도 찐득한 맛이 살아 있는 이 작품은 1993년 봄과 여름을 살았던 마흔 살 건달의 짠내 나는 인생 이야기다.
 “희수가 아미를 쳐다봤다. 싸움에선 그토록 용맹무쌍하던 아미가 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스무 살엔 희수도 아미 같았다. 감정에 수분이 가득해서 무엇이든 쉽게 끓어올랐다. 뭐든 지금보다 더 슬펐고 더 분했고 더 불쌍했고 더 그리웠다. 그 뜨거운 것들이 전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465쪽)
 이 소설의 주인공 희수는 마흔 살, 전과 4범, 부산 변두리 구암 깡패들의 중간 간부이자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다. 만리장 호텔의 사장이자 구암 암흑가의 보스인 손영감의 오른팔이기도 하다. 부하들 몰래 우울증 약을 먹으며 호텔방에서 ‘달방’을 살고 있다.

 건달로 사는 데 염증을 느끼고 구암 바다를 지긋지긋해하지만 달리 갈 곳도, 딱히 바라는 삶도 없다. 그런 희수가 20년간 모신 보스 손영감을 떠나 새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사랑해온 여자와 그녀의 아들(아미)과 함께 잠시나마 가족을 꾸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폭력조직이란, 아니, 세상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기에 거대 세력 간 충돌과 음모 앞에 개인의 삶과 신념은 이용당하고 희생되기 마련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기 일신의 안위를 살피고, 눈앞의 이익을 좇고, 암투와 회유, 배신으로 일희일비한다.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격랑이 이토록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갈등과 첨예한 권력 싸움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가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던지는 그 뜨거움 때문이다. 즉흥적이고 속물적인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바라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으로 슬프고 씁쓸한 우리네 인생이기 때문이다.
 희수는 모든 인물, 사건과 관계돼 있으면서도 한 발짝 떨어진 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매사 시니컬하다. 그런 성격은 희수가 가진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결핍에서 왔다. 그는 아버지라는, 모르는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자랐다. 어디에도 마땅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희수의 삶을 유지시키는 건 손영감-희수, 희수-첫사랑 인숙의 아들(아미)의 유사 부자관계이다. 손영감에 대한 의리와 아미에 대한 애틋함이 희수를 움직이게 하는 두 개의 큰 축이다. 때로는 부드럽고 뭉클하게, 때로는 잔인하고 힘겹게 희수를 흔들어대는 두 축은 그래서 더 강렬하게 부각된다.
 김언수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 구암의 풍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은 그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재탄생시킨 것이다. 삼류 건달들과 사창가 여인들, 황홀한 쇼윈도 불빛, 피와 눈물과 흐느낌 등 온갖 직설적인 것들로 가득했던 그 거리를 작가는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점점 더 치열하게, 점점 더 비열하게 살게 되는 인물들의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삶은, 단순히 그들이 건달이고 악행을 저지른다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오히려 지금 우리의 “쾌적하고 젠틀하고 깔끔한” 삶과 대조되는 강렬함으로,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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