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관대작 이면에 존재하는 어리석음 신랄하게 풍자
  • 이경관기자
고관대작 이면에 존재하는 어리석음 신랄하게 풍자
  • 이경관기자
  • 승인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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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숙 교수의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읽기
▲ 포항시민들에게 ‘리어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권오숙 교수.

포항시립도서관은 겨울방학을 맞아 오는 22일까지 4회에 걸쳐 셰익스피어 국내 권위자 권오숙 한국외대 교수를 초청해 특별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주 ‘햄릿’에 이어 ‘리어왕’을 들여다본다. 

 

(2)리어왕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극 중 감정의 격렬함이나 비극성이 가장 장대한 극이다.
 리어의 비극적 결함은 ‘독선과 분노’로 정의할 수 있다.
 흔히 리어 왕의 권위 의식과 제어되지 않는 분노, 판단력 부족이 그의 성격적 결함으로 여겨진다.
 재미있는 것은 ‘리어왕’이 주플롯인 리어 왕과 세 딸의 이야기와 부플롯인 글로스터 백작 이야기가 함께 얽혀 있다는 점이다.
 이 두 플롯은 긴밀한 상호 연계 속에서 ‘외양과 실재의 괴리’, ‘인식의 한계’라는 주제를 변주하는 구도로 돼 있다.
 이 극에서 리어 왕의 두 딸은 아버지의 권력과 재산을 분배받은 뒤에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박해한다.
 글로스터 백작의 야심에 찬 서자 에드먼드는 권력과 재산을 위해 형을 음해해 쫓아내고, 리어 편을 드는 아버지도 리어의 둘째 딸 부부에게 밀고한다.
 리어의 두 딸은 유부녀이지만 젊은 야심가 에드먼드에게 반한다.
 큰 딸은 에드먼드에게 자기 침대의 현 주인(올바니 공작)을 죽이고 자신의 침실을 차지해 달라고 애걸하는 연서를 보낸다.
 결국 동생에게 이 남자를 빼앗길 상황이 되자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생을 독살한 뒤 자결한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다.
 사람들은 권력과 재산에 눈이 멀었고,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불타오른다.
 부모 자식 간의, 형제자매간의 천륜도, 부부간의 인륜도 욕망으로 인해 모두 사그러진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제 정신으로 견뎌낼 수가 없다.
 리어 왕은 폭풍우 속에 황야를 헤매면서 미쳐간다.  에드가는 생존을 위해 미친 톰 노릇을 한다. 미친 그들은 광상곡을 부르며 헤매고 다닌다.
 그들의 대사는 혼란으로 가득 찬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랩소디이다.
 그런데 그 대사들은 얼핏 미친 자의 헛소리 같지만 그 안에 삶과 실존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있다.
 부조리한 세상의 면면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풍자가 숨어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해부가 담겨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리어 왕의 비극은 말로 표현하는 애정의 크기에 따라 세 딸의 사랑을 측정해 왕국을 나눠준 데서 시작된다.
 그는 어리석게도 온갖 거짓된 언어로 사랑을 표현한 두 딸에게 모든 권력과 재산을 물려주고 달콤한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기를 거부한 막내딸 코딜리아를 내쫓는다.
 리어 왕의 모습에는 아첨이나 감언이설에 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사랑표현 대회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는 끊임없이 인간의 판단력을 흐린다.
 리어와 세 딸의 이야기가 주 플롯이라면 글로스터 이야기는 부플롯이라 할 수 있다.
 주플롯의 리어처럼 부플롯의 글로스터는 서자 에드먼드의 음모에 휘둘려 적자 에드가가 자신을 음해하려 했다고 생각했고 그를 추방한다.
 하지만 진짜 리어를 음해하는 자는 서자 에드먼드다.
 그는 리어의 둘째딸 부부에게 아비를 고발하고 아비의 재산과 권력을 차지한다.

 리어와 글로스터 백작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심한 고통의 과정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사물을 제대로 보는 혜안을 얻게 된다.
 리어 왕은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비로소 신랄한 자기인식을 하게 된다.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양족 동물(3막 4장)’, ‘학질을 면할 수 없는 존재(4막 6장)’, ‘어리석고 망령든 노인(4막 7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리어는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이 불러온 비극적 상황을 깨닫고는 자책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와 글로스터를 통해 ‘잃어야 비로소 얻는다’는 역설의 세계를 그린다.
 리어는 권력과 재산, 딸들의 존경과 사랑까지 잃는 경험을 한 뒤에 정신적인 성숙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갖게 된다.
 글로스터도 자신의 모든 작위와 재산을 박탈 당하고, 눈까지 뽑히는 시련을 겪은 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지니게 된다.
 어리석은 판단으로 온갖 고통을 겪은 후에 이런 인식에 이르는 두 인물에게서 장엄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리어 왕은 비를 피하러 들어간 오두막 안에서 미치광이 거지 행세를 하는 글로스터의 장남 에드가가 반 벌거숭이의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벌거벗은 에드가를 보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모습이 구차하고 벌거벗은 양족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어: 인간이 이것밖에 안된단 말이냐? 저 자를 잘 생각해 보아라. 너는 누에에게 비단도, 짐승에게 가죽도, 양에게 양모도, 사향 고양이에게 사향도 빚진게 없구나. 하! 여기 우리 세 사람은 가짜로구나. 너는 타고난 그대로인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인간은 너처럼 가난하고, 벌거벗은 두 다린 가진 짐승에 불과하구나. 벗어라 벗어, 빌려입은 겉치레를!”(3막4장)
 리어가 옷을 찢는 행위는 왕으로서 지니고 있던 권위와 독선을 버리는 상징적 장면이다.
 여기서부터 리어는 이전의 독선적이고 권위에 찬 리어가 아니라 용서를 빌 수 있는 진정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리어: 넌 날 용서해주어야 한다. 부디 다 잊고 용서해다오. 나는 늙고 어리석은 노인이란다.”(4막7장)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을 그려낸 이 극에서 ‘견인주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에드가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의적인 자살 장면을 연출한다.
 이로써 글로스터가 부조리한 세상에서 운명의 매질을 견디는 인물로 재탄생된다.
 변덕스런 운명의 매질을 당하고 있는 리어 왕, 에드가, 글로스터 백작의 견인주의가 염세주의의 저변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에드가: 뭐라고요? 또 자살하실 생각인가요? 인간은 태어날 때처럼 세상을 떠나는 것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5막 2장)
 리어 왕은 황야를 헤매며 가장 궁핍한 자들의 삶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인간 세상의 정의의 부재를 느끼고 좀 더 의로운 방식으로 사회를 재정립해야 함을 인식한다.
 “리어 왕: ……아! 나는 지금까지 이런 일에 너무 무관심했다. 허영에 찬 자들이여, 이를 약으로 삼아 헐벗은 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경험해 보아라. 그대에게 넘치는 것을 털어내 그들에게 나눠줌으로써 하늘이 좀 더 공명정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3막 4장)
 리어왕의 이러한 대사를 통해 법이 기득권의 편에 서 있음을 비판한다.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에서 왕이나 고관대작 옆에는 광대가 따라 나온다.
 “광대: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들은 장님이 되지만, 아비가 돈주머니를 지니면 자식들은 효자가 된다네.”(2막 4장)
 광대들은 고관대작의 엄숙한 태도나 진지한 언어 이면에 존재하는 어리석음과 허위를 해학적이지만 신랄하게 풍자한다.
 그들은 말놀이, 노래, 수수께끼 등 다양한 민중의 언어를 사용해 특유의 비유와 역설로 세상을 풍자한다.
 ‘리어 왕’ 속의 광대는 리어 왕의 비극적 노정 내내 그의 옆에서 광대 특유의 재치 있는 재담으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 리어 왕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조롱한다.
 400년 전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읽혀지는 것은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이 현대의 인간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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