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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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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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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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의 클래식 이야기
▲ 김일영 포항유스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경북도민일보] 오늘은 고전주의 음악과 하이든에 대해 알아보자.
요즘 신세대 청년들은 장학퀴즈라는 TV프로그램을 잘 알지 못하지만, 30~40대 이상 세대들이 학창시절 들었던 장학퀴즈 노래, 몇 년 전까지 서울 지하철에 사용되었던 그 음악이 바로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3악장이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던 ‘놀람’, ‘군대’, ‘시계’ 등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작곡한 이가 바로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다.
△‘소나타 형식’은 고전주의 음악의 특징
시기적으로 볼 때 보통 고전주의 시작은 1750년 ‘바하’가 작고한 해를 시작으로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827년을 끝으로 본다. 고전주의는 ‘다성음악’에서 ‘화성음악주’의로 발전한 것과 ‘소나타 형식’을 사용한 것이 큰 변화이다.
‘소나타’란 처음에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독주곡에도 사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악기 하나로 독주하여 연주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소나타라고 일컫는다. 쉽게 말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의 악기를 하나만 가지고 연주를 하도록 작곡된 곡이 ‘소나타’인 것이다.
‘소나타의 형식’은 쉽게 말해 보통 곡의 주제가 2개인데, 1주제는 남성적으로, 2주제는 여성적으로 완전히 바뀌며, 2주제로 넘어갈 때에는 완전 5도로 조가 바뀐다. 형식은 4부 형식으로,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 종지부로 곡의 흐름이 변화된다. 
빈고전파 3인방이라고 불리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모든 곡에 소나타 형식을 따랐다. 특히 ‘하이든’은 소나타형식을 정립하고 보급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소나타 형식’은 당시에는 시대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음악 스타일이었다.
△머슴에서 시작해 불멸의 작곡가로 자수성가한 요셉프 하이든
하이든은 1732년 헝가리 접경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 ‘로라우’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간 마차바퀴 제작공이였고, 어머니는 귀족의 가정부였다. 하이든은 어릴 적부터  민속 음악에 조예가 깊고, 하프를 수준 높게 연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 천재성이 타고났다고 한다. 6살 때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부모는 ‘하인부르크라’는 소도시에 있는 음악 교사에게 보내 음악교육을 받게 했다. 하이든은 형편이 어려워 음악교사 밑에서 빨래와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하며 음악교육을 받았다. 말이 음악 공부를 위해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음악선생 집의 머슴에 불과했다.

이렇듯 철부지 나이 6세 때부터 온갖 고생을 하며 틈틈이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웠고, ‘하인부르크 성당’의 성가대에 소년 소프라노로 단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거세당할뻔한 하이든
하이든 시대에는 성당에서 여성이 예배당 안에서 신을 위한 노래들 할 수 없었다. 오직 남성의 목소리만 신께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경우 변성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부르게 하거나 또는 ‘카스트라토’를 양성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영화 ‘파리넬리’에는 ‘카스트라토’의 거세 장면이 나온다. 오늘날에는 ‘카스트라토’라는 가수를 양성 하지 않고 남자 성악가가 여자 소프라노 소리는 내는 ‘카운트 테너’ 가수라는 성악 형태를 만들었다.  하이든은 청소년기부터 20대 중반까지는 무일푼으로 친구들과 함께 거리의 악사노릇을 하며 사실상 거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 여려운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청년 하이든에게는 다른 음악가들처럼 귀족의 전속 음악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퓌른베르크 남작의 비상근 작곡가 겸 음악 교사로 일자리를 가지게 되자, 남작은 하이든이 마음에 들었는지, 1757년 하이든이 27세 당시에 ‘모르친 백작’(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집안에 악장(카펠마이스터)으로 취직할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하이든은 처음으로 안정된 전속 직책을 얻게 되었고, 이 시기에 교향곡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760년에 들어 모르친 백작의 재정이 악화되자, 이듬해에 헝가리계 귀족 집안인 ‘에스테르하지 가문’으로 옮겨 악장으로 활동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당시 후작 작위를 보유하고 있던 유력 귀족 세력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꽤 높은 수준의 악단도 고용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하이든은 우수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마음대로 쓰면서 실험적인 교향곡을 자유롭게 작곡하였다.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집안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음악 일을 하였고,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인들이었던 ‘파울 안톤’과 ‘니콜라우스’ 두 공작들을 위해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수백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하이든은 사실상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신세였음에도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도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1780년대 중반쯤에는 ‘모차르트’와도 친교를 나누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교향곡 45번 ‘고별(Abschied)’ 관한 에피소드
당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아름답고 호화로운 큰 성을 지었는데 궁정악단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가족과 멀리 떨어져 그 성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가족들과 멀리 오랫동안(1년 이상) 떨어져있던 악단 단원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일자리를 잃거나 월급이 줄어들까 하여 노골적인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하이든은 이런 편치 않는 단원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향곡 45번 ‘고별’을 작곡했다. 특히 고별 교향곡 4악장에 불만 퍼포먼스를 잘 표현했다. 음악으로 고용주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최초의 퍼포먼스가 있는 교향곡이 되었다.
불만을 어떻게 퍼포먼스로 표현했을까? 보통의 교향곡 4악장은 웅장하거나 활기차게 곡을 마무리하는 반면에 하이든 고별 교향곡 4악장은 시작되면 이상하게도 활기가 없다가 곡 중반부터는 관악기 등이 차례로 촛불을 끄며 한 명씩 퇴장하고 계속해서 오케스트라 현악기 연주자도 따라서 보면대 촛불을 하나씩 끄고 사라진다. 곡 끝 부분에는 지휘자가 먼저 퇴장하고 마지막으로 바이올린 1명만 남고 조용히 사라진다. 이 즉흥적인 이벤트는 불만에 대한 시위이기 이전에 서로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촛불이 모두 꺼지자 이 연주의 의미를 알아차린 후작은 “이들이 모두 떠난다면 우리도 떠나야겠군”이라고 말하고 하이든과 악단을 아꼈던 고용주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초연을 보고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 다음날로부터 꿈만 같았던 장기 휴가를 주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위대한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이렇듯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의 일생은 흙수저로 태어나 거세당할뻔한 위기와 함께 머슴 같은 유년기와 거지같은 청년기를 거쳐 실로 진흙탕 속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 같은 기적의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의 모진 고통 끝에 찾아온 귀족 가문의 샐러리맨 음악가가 된 청년 하이든은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된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성공한다.
다사다난했던 하이든의 삶 속에 탄생한 교향곡 45번 ‘고별(Abschied)’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하이든의 공감능력과 창조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단순한 음악 소리만 연주해 내는 교향곡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을 무대에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더하면서, 하이든은 이제 듣는 음악에서 보고듣는 음악으로 발전시켜, 무대와 관객이 서로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창조했다.
하이든의 일생을 보면서 필자는 청년실업으로 인생의 어려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위로의 메시지 전해본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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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mine 2017-05-16 08:59:01
임형주님은 '팝페라테너' 이십니다. 카운터네너라는 내용은 수정이되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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