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운파 최관호 선생을 아십니까
  • 김형식기자
독립운동가 운파 최관호 선생을 아십니까
  • 김형식기자
  • 승인 2017.0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거 70주년 일대기 재조명
▲ 운파 최관호 선생 약관 25세에 하얼빈에서 창간한 만몽일보(滿蒙日報) 사장 시절.

[경북도민일보 = 김형식기자] 구미가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운파 최관호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막는데 필요한 건 불과 1시간이었다.
1946년 10월 17일, 운파 최관호 선생은 당시 선산군 해평면 지서 앞 농창(農倉)에서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됐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즉각 석방 조처가 1시간만 빨랐더라면 독립운동 격동기에 하얼빈에서 만몽일보(滿蒙日報)를 창간한 언론인이자,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결성된 최대의 항일조직 신간회(新幹會) 선산지회 창립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운파 선생의 애통한 비명은 울려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운파 선생의 나이 갓 마흔이었다. 
‘잊혀진 독립운동가’로 불리던 운파 선생의 일생이 조금씩 조명되고 있다. 올해로 서거 70주년을 맞은 운파 선생의 추모제가 지난 4월 8일 구미시 해평면 쌍암고택 인근에서 열렸다.

 △ 운파 선생 추모제 열려
 추모제는 운파 최관호 선생 추모사업회, 구미시 해평면 노인회, 전주 최씨 인재공파 해평문중이 주최했으며 300여명의 추모객이 참여할 정도로 지역민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추모사업회 최열 회장은 “운파의 독립운동 행적을 통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희생하신 올곧고 충직한 정신을 먼 훗날까지도 잊지 않도록, 자손과 후손들에게는 영원한 가르침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미 선산지역 근현대사 연구모임 김종길 대표는 “운파 선생은 ‘일(一) 관호(최관호), 이(二) 상호(김상호), 삼(三) 상희(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형인 박상희)’라 불릴 정도로 구미와 선산지역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대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며 “그동안 여러가지 제약으로 잊혀진 독립운동가로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청년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끌어 온 지도자였다”고 밝혔다.
 운파 최관호는 16세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일선지를 저술한 인재 최현의 13세손으로 1905년에 출생한 선생은 20대 초반인 1925년 신간회 산하 구산구락부 창립을 시작으로 구미 선산의 청년운동과 지역사회의 진보를 이끌면서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운파 선생은 1927년 신간회 선산지회 창립을 주도했고, 1929년 중국 하얼빈에서 사재를 들여 만몽일보를 발간하며 신문을 활용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8월에 발생한 대구 조선은행폭탄의거의 주역 장진홍 선생이 옥중 자결하자, 운파 선생은 만몽일보에 한중 양국의 공동항일전선 구축을 촉구하는 “민족이여 각성하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그는 이 사설 때문에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어 국내로 강제 송환 돼 옥고를 치렀다.
 운파 선생은 석방된 후에도 해평 수리조합 반대운동(일제가 조선농민의 지배와 수탈을 위해 설치한 수리조합에 반대해 벌인 조선농민의 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농민의 경제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해평 소비조합에 참여하는 등 1930년대에도 독립운동을 열정적으로 이어갔다.
 또한 운파 선생은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대부분 신간회의 지역간부로 활동하던 경북도 내의 기자들로 결성된 ‘보도협조망’에 선산군 대표로 참여했고, 1934년부터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언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다.
 1944년 서울에서 초당의숙을 세운 여운형 선생과 물산장려회 이사를 지낸 안재홍 선생의 주도 아래 건국동맹 결성이 추진되자, 경북에서도 성균관대학교 초대학장을 지낸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연계조직이 결성되었고 운파 선생도 이곳에 몸담았다.
 비밀리에 추진된 건국동맹 결성이 드러나면서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과 함께 운파 선생은 1945년 8월 7일 왜관경찰서에 구속됐고, 8월 15일 해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더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날 오후 8시에 석방됐다. 민족해방의 찬란한 기쁨을 옥중에서 맞이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은 이뤄졌으나, 당시 국내 정세는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민생파탄으로 인해 크게 혼란스러웠다. 운파 선생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 지역사회에서 만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 독립운동으로 옥중에서 해방 맞아
 그해 9월 선산군 면 단위에 설립된 구미면 치안유지위원장에 당선됐고, 이듬해 2월엔 해평면 2대 의용소방대장에 취임하는 등 구미 선산 지역의 치안유지에 힘썼다.
 이 시기 운파 선생의 가장 큰 공적은 민생파탄으로 발생한 총파업국면의 폭력사태를 저지한 것이다.
 엄청난 식량난과 살인적인 물가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불만은 1946년 가을 무렵 정점에 도달했다. 그해 9월 말 쌀값은 한말에 1500원까지 치솟아 전년도보다 10배 이상 폭등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들은 연일 도청과 부청에 모여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기아(飢餓) 시위에 나섰다.
 민생파탄이 극에 달한 9월 23일 부산의 철도노동자가 일으킨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합류해 총파업국면이 펼쳐졌다.
 대구에서도 27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일명 ‘대구투위’)가 출범했고 30일엔 중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해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구투위는 경북 인근 지역까지 확장됐고, 10월 3일 해평에서도 약간의 소요가 발생했다.
 경찰서와 우체국이 전소되고 다수의 경찰들이 살해되는 등 인근 지역의 소식에 고무된 일부 청년들이 친일 전력이 있는 면내 유지들, 관공리, 경찰들을 폭력 응징하려는 조짐을 보인 것이다. 이때 흥분한 청년들을 꾸준히 설득해 해평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 바로 운파 최관호 선생이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만 하던 운파 선생은 광복 이후 극단적인 좌우이념 대립으로 치닫던 미군정하인 1946년 10월 16일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강제 연행됐고 이튿날 구미시 해평면 해평지서 앞 농창(農倉)에서 재판 없이 즉결 처분돼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일설에 따르면 해평 지역 유지였던 경모씨의 무고로 억울하게 연행 됐다고 한다.

 경모씨는 이후 수리조합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 했지만 불우한 만년에는 죄를 깨닫고 운파 선생의 유족들에게 뒤늦은 사과를 했다고 해평지역 주민들에겐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다.
 머나먼 타국에서 신문을 발간한 깨어있는 언론인이자, 누구보다 앞장서 구미 선산 지역의 발전을 이끈 지역사회의 기수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애국지사이다.
 끊임없는 일제의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이겨낸 운파 선생의 전력에서 좌익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인데도 무고로 인한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마지막치곤 너무 허망한 죽음이었다.
 조국 해방의 그날도 옥중에서 보낸 치열한 독립운동가 운파 선생의 일생은 누구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고 후손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구미 선산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고 지역발전의 기수였던 운파 선생의 공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운파 선생의 후손들과 민간의 연구자들이 그의 일대기를 역사에 남기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제는 정부의 주도 아래 보다 적극적인 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재판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마땅할 것이다.
 
 △ 좌익으로 몰려 즉결 처분으로 처형 당해
 오랫동안 운파 선생의 생애와 경력을 연구해온 구미 선산지역 근현대사 연구모임 김종길 대표는 “운파의 독립운동은 당시 동아일보에 실렸던 신문기사, 지인들이 주고받은 편지, 사진과 ‘일제하 대구의 언론연구’, ‘폭풍의 10월’에 실린 내용으로 삶과 경력을 재조명했다. 선생의 투철한 독립정신은 언론계, 대한광복회, 사회활동, 건국동맹활동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재조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우리 근현대사의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깊은 상흔들이고 불편한 진실이다. 최관호의 생애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7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역사의 무대가 아닌 망각의 광장에 그를 내버려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지난 시기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가 됐다.
 어둡고 칙칙한 과거일수록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서 우리의 역사로 보듬어 안을 때 용서와 화해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만이 남은 유족들의 상처도 아물고, 깊은 곳으로부터의 치유와 더불어 생명의 새 살이 비로소 차 오를 것이다. 해원(解寃)이 없는데 어찌 화해와 용서가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민간차원의 연구를 계승해 운파 최관호 선생의 일대기 조명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지역사회의 위인들을 발굴해내야 할 것이다.

 

■ 운파 최관호 선생 약력

1905년 출생.
1925년 말 구산구락부(龜山俱樂部) 창립을 시작으로 구미 선산지역의 청년운동을 개척.
1927년 10월 신간회 선산지회 창립에 참여. 1927년 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에서 일시 수학.
1929년 초 중국의 하얼빈에서 만몽일보(滿蒙日報)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1930년 8월 대구 조선은행폭탄의거의 주역 장진홍 선생이 옥중에서 자결하자 만몽일보에 “민족이여 각성하라”는 사설을 게재하고 이를 배포하였다가 일본경찰에 피검되었으며, 국내로 강제송환된 후 옥고를 치름.
1931년 이육사(李陸史) 등 경북에서 활동하는 언론인들과 함께 보도협조망을 운영.
1934년 5월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로 취임하여 활동.
193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차례 피검과 가택연금.
1944년 결성된 건국동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왜관경찰서에 피검되어 8월 16일 석방.
1946년 10월 17일 해평지서 앞 농창(農倉)에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