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작가’ 김주영, 서민들의 삶의 애환 작품에 담다
  • 이경관기자
‘길 위의 작가’ 김주영, 서민들의 삶의 애환 작품에 담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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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순례-6. 청송 객주문학관
▲ 사진 위부터 김주영 작가가 관객들과의 만남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객주문학관 전경.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들은 그 자체로 한권의 특별한 책이다.
경북·대구에는 작가들의 삶과 문학적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문학관이 여럿 있다.
삶의 지혜를 찾아 지역 곳곳에 자리 잡은 문학관을 둘러보자.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
 보부상 ‘천봉삼’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조선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그린 김주영의 대하장편소설 ‘객주’.
 ‘길 위의 작가’라 불리는 김주영은 장돌뱅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스스로 장돌뱅이의 삶을 걸었다.
 포항에서 출발해 동해대로를 지나 상주-영덕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30분가량 달리다보면, 가장 낮은 신분으로 가장 높은 곳을 넘나들며 가장 낮은 곳에서 잠든 사람들의 지난했던 삶과 그들을 추적했던 한 소설가의 삶을 마주할 수 있다.
 청송군 진보면 청송로 6359 ‘객주문학관’.
 
 △ 소설가가 되기까지-김주영의 생애
 소설가 김주영은 1939년 사방 100리 안에는 공장도 없고 기찻길도 없는 경북 청송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김주영은 탯줄을 끊고 난 순간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그 날의 잠자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김주영은 어릴 때부터 떠돌이가 됐다.
 초등학교 때 하교 후 버스 정류장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떠돌이의 삶을 동경했다.
 김주영은 열여섯에 대구로 떠나 풍찬노숙을 일삼으며 어렵사리 대구농림고를 졸업했다.
 1959년 서울로 올라와 친구집에 붙어 살며 서라벌예대에 진학 문예창작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택한 안동엽연초 생산조합의 경리로 일했다.
 퇴사 후 1971년 소설 ‘휴면기’가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5년간의 자료 수집과 장터 순례를 거쳐 1979년부터 서울신문에 소설 ‘객주’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4년 9개월간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역사소설 ‘객주’를 연재했고 ‘길 위의 작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81년 대하장편소설 ‘객주’를 출판하고 1984년 이 작품으로 제1회 ‘유주현문학상’ 을 수상했다.
 이후 ‘야정’, ‘화척’, ‘활빈도’ 등 피지배층의 길바닥 인생을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토속적 어휘로 녹여낸 소설을 썼다.
 1989년 자신의 소설이 ‘동어반복’이 너무 심하고, 상업성에 침식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절필을 선언했다.
 2년 후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여러 편의 대하역사소설을 완성한 후 ‘홍어’라는 새로운 감각의 소설로 독자와 평단의 갈채를 함께 받았다.
 이후 ‘멸치’, ‘빈 집’, ‘잘가요 엄마’, ‘뜻밖의 생’ 등 다양한 작품을 쓰며 현재까지 한국문단의 대부로 활동하고 있다.
 
 △ 문학은 위로다-김주영의 문학세계
 “나에게 소설은 재주가 아니라 뚝심이자 견디는 힘이었다.”
 김주영은 모든 글은 작가의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고 생각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이야기꾼이 되고자했다.
 특히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투철한 작가관을 바탕으로 부황한 작가적 욕망보다 작품의 진실을 위해 골몰했다.
 ‘객주’와 ‘홍어’ 등의 소설에서 발휘되는 김주영 작가의 힘은 어린시절 가난에서 비롯됐다.
 일제 말기에 태어난 김주영에게 아버지는 없었고 어머니는 그를 힘겹게 홀로 키워야 했다.
 학창시절엔 점심을 못 먹고, 물로 배를 채웠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학교가 끝나면 근처 장터나 버스 정류장을 서성거리며 낯선 사람, 처음 보는 물건 등을 보며 허기를 달랬다.
 어릴 땐 문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사볼 엄두를 못 냈던 그는 교과서마저도 이웃집에서 빌려 공부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시절 가슴 속 켜켜이 쌓인 회한을 글로 풀어보자는 마음이 일었고 시인이 되기를 꿈꿨다.
 25살 안동에서 경리를 하던 시절 새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슬픔에 꽤 오랜 방황을 했다.
 장파열이 왔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자기 학대가 심했다.

 힘든 가족사에 부정부패가 심한 회사생활을 그를 더욱 힘들게 했고 그는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이 세상엔 나를 거둬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김주영은 장돌뱅이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스스로 장돌뱅이가 됐다.
 ‘객주’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개 시골 장터를 돌아다녔으며, 연재 기간에는 한 달에 이십 일 이상 장터를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옛 보부상과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장 상인들과 먹고 자고 이야기하며 떠돌았다. 
 그렇게 전국을 유랑하며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원고를 써서 서울신문 지국에 보내고 나면 또 다음 지역을 향해 출발하는 생활이 연재하는 5년 내내 이어졌다.
 길 위의 인생에 대한 애착과 연민을 가슴에 품고, 인생과 사랑에 대한 깊고 조용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김주영.
 시인 푸시킨은 시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고 말했다.
 김주영은 길 위의 인생을 통해 또 다른 길 위의 인생을 위로하며 ‘문학은 위로다’라고 말한다.
 
 

▲ 문학관에 전시된 ‘객주’

 △ 가장 높은 곳 넘나든 가장 낮은 사람들의 이야기 ‘객주’
 “일행은 노루잠으로 눈을 붙이는 시늉만 하고 축시 말에 일어나 채비를 가다듬었다. 가파른 자드락길을 피가 짚신을 적시도록 걸음을 재촉했다.”(‘객주’ 중)
 소설 ‘객주’는 9할이 길 위에서 모진 풍상을 견뎌내며 쓰인 소설이다.
 직접 발로 뛰며, 상인들과 호흡하며 쓰여진 소설 객주는 작가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우리 선조들의 삶의 역사다.
 객주는 산 넘고 물 건너 조선팔도 저잣거리로 물품을 유통한 보부상 ‘천봉삼’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조선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다.
 객주의 첫 문장은 문경새재로 일컫는 주흘산 계곡을 적시는 새벽안개를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김주영이 그곳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는 경기지방과 삼남지방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길로 알려졌기 때문.
 객주는 한강 중류의 목계장터, 강원도 영월장, 경상도 내륙의 안동장, 전라도의 벌교장과 정읍장, 강경포구까지 이어진다.
 주인공 천봉삼과 주변인물들은 조선 말기 하층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지배층에 괄시당하고, 춥고 더운 날씨에 이골났으며 산적과 호랑이에 쫓겼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투박한 성품에 별 재능은 없었지만 의리가 있었고 지나친 이익을 탐하지 않았으며 무한한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김주영은 “보부상들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가장 높은 곳을 넘나들며 가장 낮은 곳에서 잠든 사람들”이라며 “소설 ‘객주’는 천민들의 애끓는 삶을 기록한 그들의 자서전이며 옛날 이야기책이며 박물지이고, 지리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객주에는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물건을 유통했던 보부상들의 모습과 함께 우리 고유언어 또 하층민들의 언어가 주는 토속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수 많은 길 위에서 고락의 생을 살았던 보부상의 모습을 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또 하나의 지혜를 얻는다.
 한편 소설 객주는 서민들의 애환을 다뤘으나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 기업인들이 읽고 감명 받은 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 관람객들이 전시판넬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 길 위의 작가와 소설 ‘객주’-객주문학관
 ‘객주문학관’은 작가가 아닌, 작품에 집중했다는 것에서 다른 문학관들과의 맥을 달리한다.
 폐교된 진보 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해 개관한 문학관은 학교 특유의 ‘ㄱ’자 형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문학관에 들어서기 전, 나무로 만들어진 구 형태의 조형물에 시선을 빼앗긴다.
 조각가 이재효가 문학관 개관 기념으로 청송 사과나무를 소재로 만든 작품으로 제목은 ‘무제’다.
 문학관은 김주영 작가의 문학 세계를 담은 전시관과 소설도서관, 스페이스 객주, 영상 교육실, 창작 스튜디오, 세미나실, 연수 시설 그리고 작가 김주영의 집필실인 여송헌(與松軒) 등으로 이뤄져 있다.
 “3층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시면 좋습니다.”
 제1전시실 ‘김주영 작가실’은 소년 김주영부터 청년, 소설가의 모습까지 다양한 김주영 작가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지독히 가난했던 어린 김주영의 삶과 그 한을 문학으로 풀어냈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와 함께 했던 카메라와 철필노트도 눈길을 끈다.
 제2전시실인 ‘소설 객주실’은 입구에서 호랑이 소리로 관람객들을 깜짝놀라게 한다.

▲ 보부상들이 썼던 물품.

 전시실은 소설 속 인물과 보부상들의 활동상, 조선 후기 상업사를 엿볼 수 있다.
 보부상과 함께했던 지게, 멍석, 저울, 사발, 목침, 저고리 등이 전시돼 있다.
 객주문학관은 ‘스페이스 객주’라는 상설 전시관을 통해 사진전, 미술전 등 다양한 전시회를 선보여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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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tks 2017-06-13 17:32:41
하나의 이론이 완전하다면 그와 다른 이론은 공존할 수 없다.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공존하는 이유는 모두 흠결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과 생명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통일장이론으로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기존의 물리학이론들을 모두 부정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물리학자들이 반론하지 못하고 있다. 가상적인 수학으로 현실적인 자연을 기술하면 오류가 발생하므로 이 책에는 수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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