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빨강머리앤’을 위하여
  • 이경관기자
세상의 모든 ‘빨강머리앤’을 위하여
  • 이경관기자
  • 승인 20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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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빨강머리앤이 하는 말’을 읽고
▲ 백영옥의 ‘빨강머리앤이 하는 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8살 터울이 있는 언니는 내게 또 다른 엄마였다.
이제 언니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최근 우연히 읽게 된 책에서 어린 시절 나와 언니의 모습을 만났다.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 ‘빨강머리앤이 하는 말’.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언니는 대학 공부를 위해 서울로 떠났다.
언니가 방학을 맞아 포항으로 내려올 때면 우리는 비디오테잎에 녹화해 뒀던 ‘빨강머리앤’을 돌려보며 과자를 몇봉지씩 까먹었다.
앤은 언니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였다.
“삐쩍 마른 말라깽이에 얼굴이 참 못생겼구먼. 어머나! 거기다 주근깨투성이야. 또 머리는 왜 이렇게 빨갛지? 머리가 마치 홍당무 같잖아.”(64쪽, ‘린드 아줌마’ 대사)
“저요. 아주머니처럼 야비하고 무례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남을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어요? 만일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너무너무 뚱뚱해서 볼품없고, 상상력이라곤 한 조각도 없어 보인다고 하면, 마음이 어떻겠냐고요!”(65쪽, ‘앤’ 대사)
첫 만남에서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린드아줌마에게 앤은 빨강머리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쏘아붙였다.
초록지붕 집에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언니와 나는 린드 아줌마와 ‘마릴라’의 당혹스런 표정을 보기 위해 몇번이고 그 장면을 돌려보곤 했었다.
며칠전 언니와 통화를 하다 그 시절 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물었다.
왜 그렇게 앤을 돌려봤던 건지.
또 대체 왜 그렇게 앤을 좋아했는지.

언니는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니가 앤처럼 솔직하고 당차길 바랬던 마음도 있었지만 아마도 내 스스로가 앤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본 언니는 앤보다 더 당당했고 솔직했으며 머리도 좋아 친구며 선생님들 모두 좋아했는데.
그런 그녀가 앤을 닮고 싶어했다니. 의외였다.
그리고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의외였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내가 몰랐던 언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맞벌이 부모님의 바쁜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사랑 넘치고 언제나 착하며 공부 잘하는 큰딸로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항상 주어진 일에 열심이었던 그녀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감정에 대한 표현은 서툴렀다.
늦둥이인 나로 인해 더 고단해진 부모님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배웠던 것이다.
대학시절 서울에 올라가 혼자 생활하며 언니는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언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등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고.
그리고 더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앤을 보며 고마움과 부러움이 일었다고 한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만 천천히 변한다. 어떤 것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라는 걸 알게 해준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60쪽)
앤은 언니에게 위로와 함께 삶의 큰 변화를 가져다줬다.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앤은 백영옥 작가에게도, 나에게도 위로가 됐다.
어쩌면 빨강머리앤은 우리 모두의 내면아이와 같지 않을까.
마음 속 어딘가를 걷고 있을 세상의 모든 ‘빨강머리앤’을 위해 “우리는 지금 나는 잘하고 있고, 잘 할 것이며, 잘 될 것이다”라고 속삭여주자.
그리고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117쪽)라고 말하는 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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