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자유 꿈꾼 최초의 시민혁명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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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자유 꿈꾼 최초의 시민혁명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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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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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
▲ 김일영 포항유스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경북도민일보] 김일영의 클래식 이야기

모차르트는 6세부터 9세까지 전 유럽을 누비며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고 9세 때 고향 잘츠부르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얼마나 대단한 음악적 역량을 갖고 있었는지 모차르트는 13세에 잘츠부르크 궁정의 악장이 된다.
나이가 어려 급여를 받지 못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에 비교하자면 ‘KBS교향악단’이나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 정도의 지위다.
요즘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살던 그 시대는 아주 보수적이라 더욱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보수도 없이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일만 하다 보니 모차르트는 한곳에서만 활동하기를 거부했다.
궁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주 음악여행을 했는데, 16세가 되어서는 연주여행이 금지가 됐다. 비교적 자유롭게 음악여행을 했던 모차르트에게는 궁정일 외에는 다른 음악연주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궁정악장이라고 해도 하인에 불과했던, 당시의 계급사회가 모차르트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모차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당시 잘츠부르크 지도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면담으로 음악활동의 보장을 정식으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다만 월급을 주는 대신에 자유로운 음악여행은 보장해줄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대주교의 욕심으로 음악천재의 모차르트를 혼자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잘츠부르크 궁정에 하인에 불과 했던 모차르트는 주인 격인 대주교에게 본인의 요구사항을 거침없이 요구했다.
그러자 불손하고 방자한 태도로 3년 동안 일한 보상도 한 푼 없이 모차르트는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불명예 해고를 당했다.
잘츠부르크의 궁정과 교회의 종속된 하인에 불과했던 모차르트는 오랜 악습을 깬 예술의 자유를 위한 최초의 시민혁명 음악가로 탈바꿈되었다.
모차르트는 16세 때 잘츠부르크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해고당한 후 어릴 적 음악신동이라고 가장 많이 환대해줬던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성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떠나는 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직 어린소년이었던 아들이 내내 걱정이 되어 프랑스로의 여행에 함께 하게 된다. 한때 크게 반겨 주었던 ‘샤보’ 백작부인 앞에서 다시 연주 할 기회가 생겼는데 한겨울 추운 방에서 30분 이상 떨며 기다리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음악 감상은 하지 않고 그림을 위한 스케치만 했다고 한다.
환대 받고 성공적인 재기를 위해 프랑스에 다시 찾아갔건만 어릴 적 모차르트의 기억은 온대간대 없고 이미 장성한 그의 모습에 그 누구도 관심 가져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뛰어난 음악성과 천재성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적인 음악가 모차르트에게도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구려 음악을 작곡하고 밤이면 선술집에서 연주를 하며 주정뱅이들이 주는 팁으로 연명하게 됐다.
모차르트는 인생 최대 밑바닥 생활을 하며 함께 프랑스로 온 어머니를 잘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지병이 있던 어머니는 어려운 생활고에 결국 파리에서 객사를 하게 된다.
어머니의 건강을 잘 챙기지 못한 죄책감에 그는 아버지에게 2통의 편지를 보낸다.
1통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내용이고 연이어 보내는 2번째 편지는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비운의 소식이었다.
당시 시간을 두어 편지를 보낸 것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부터의 가족의 보호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모차르트는 한 곡의 바이올린 소타타를 작곡하게 된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No.4 K.304’ 이다. 이곡을 잘 감상해보면 당시 힘들었던 모차르트의 생각들이 느껴 질 수 있을 것이다.

잘 돌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죄책감으로 힘들어 했던 그의 현실, 가족이 함께 받아야 했던 죽음의 충격을 걱정한 그의 편지!
모차르트는 그의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바로 음악의 힘으로 이겨냈다.
약 5년 동안 파리에서의 처참한 날들을 보내고 21세가 되던 해에 패전 장군과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다시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간다.
따뜻하게 맞아 줄줄 알았던 고향은 그를 더욱 홀대했고 콜로 레도 대주교와의 수년전의 악연으로 고향땅에서 정착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모차르트는 다시 고향을 등지게 되는데 그의 나이 25세 1781년 3월이었다.
모차르트의 영광은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드디어 만들어지게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그의 나이 25세부터의 이러한 전성기 때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계급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좋아 해준다면 장소를 불문하고 몇 시간씩 즉흥연주를 해줬다고 한다.
청년 모차르트는 누군가를 새로 사귀게 되면 금방이라도 목숨과 전 재산을 다 내어 줄 수 있을 만큼 소탈하고 순박한 청년이었다.
21세의 모차르트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음악 여행 중 들른 독일 만하임에서 자신이 만든 오페라 주역 소프라노 가수 ‘알로이지아 베버’를 만나게 되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남성 편력이 있는 ‘알로이지아’는 자식이 3명이나 있는 화가 유부남과 정분이나 모차르트를 떠나게 된다.
천재의 사랑은 일반인과 다른 것인가?
모차르트의 사랑은 유별났던 것이다.
바로 자신이 깊이 사랑했던 ‘알로이지아 베버’의 친 여동생 ‘콘스탄체 베버’와의 갑작스러운 결혼이었다.
이일로 모차르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돈벌이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아내 콘스탄체와의 결혼 후 경제관념이 없는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무분별한 낭비가 모차르트를 빚더미에 오르게 하였다.
도대체 모차르트는 얼마를 벌었을까?
당시 빈에서 함께 유명세를 누렸던 음악의 아버지 ‘하이든’의 연봉은 약 1000굴덴 지금의 한화로 환산한다면 약 3600만원 정도이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전 소속이었기에 큰돈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소속이 없는 자유직업인이라 작곡 의뢰만 있다면 큰돈을 벌수가 있었다. 그의 연봉은 약 3400굴덴 한화로 약 1억2000만원 정도 된다.
연봉 1억 이상이면 작은 벌이도 아니었을 텐데 가난하게 살아야만했던 모차르트!
부인의 낭비벽으로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부부의 사랑으로 추운겨울날 땔감이 없이도 부부가 밤새 껴안고 함께 춤을 추며 한기를 이겨냈다는 일화도 있다.
세기적 천재의 삶은 정말 유별나긴 하다.
모차르트가 가난 속에 작곡한 최후의 3대 작품은 교향곡 39·40·41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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