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세상사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다. 엉뚱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고, 부조리한 상황과 맞닥뜨리게도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생채기를 입는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상황 앞에서 그래도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우리는 가장 손쉬운 상대인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곤 한다. 그래서일까. ‘내 탓이요,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자기 성찰의 말이 가끔은 인간 운명을 자조하는 비탄의 노래로 들리기도 한다.
자신의 잘못 탓으로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고 해도 금세 깔끔해지는 건 아니다. 자갈밭 같고 소금밭 같은 마음의 찌꺼기는 한동안 남는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까. 그저 시간만이 필요하다. 거칠고 짠내 밴 마음을 평상심으로 돌리는 데에 걸리는 최소한의 시간. 흙 묻은 손끝을 닦아주고 쓰라린 명치를 감싸줄 손수건 같은 시간. 한 장의 아마포로 만든 손수건이 함께 하는 그 순간을 우리는 힐링 또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 그 시간을 좇아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고 또 누군가는 한 권의 책에다 밑줄을 긋는다.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 이런 손수건에 관한 장면이 나온다. 루마니아 출신 독일인 레오는 먼 타국인 소련의 수용소에서 생활한다. 생계형 석탄을 팔러 간 집에서 한 노파를 만난다. 땟국에 전 손, 절박한 눈빛으로 석탄 보자기를 내미는 레오. 노파는 레오에게서 이웃의 밀고로 시베리아로 추방당한 자신의 아들을 읽는다. 노파는 말없이 석탄 한 덩이를 사주고 뜨거운 수프까지 내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장롱 깊숙이 숨겨둔 아마포로 된 흰 손수건을 꺼내 레오의 손바닥을 감싸준다. ‘이 손수건을 가져도 좋아.’라고 직접 말하는 것보다 더한 영혼의 찌름을 레오는 경험한다. 5년간의 수용소 생활 동안 레오는 노파의 손수건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굶주림에 시달려 몇 번이나 먹을 것으로 바꿀 뻔했지만 끝까지 손수건을 지켜낸다. 트렁크에 고이 간직했던 손수건은 귀향길에 오른 레오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준다.
복잡 미묘한 게 인간인지라 사는 게 항상 꽃밭일 수는 없다. 우리 일상은 자갈밭과 꽃밭의 무한한 변증법으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우리는 무심코 내딛은 발자국에 스치는 꽃잎이 되거나, 시린 무릎을 힘겹게 굽혔다 일으켜 세워야 하는 나귀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수백 번 무너진다한들 영원한 패배는 아니라는 사실.
가뭄으로 바닥난 저지대처럼 마음이 갈라지는 날이면 레오의 손수건을 꿈꾼다. 여러분, 손수건이 있나요? 헤르타 뮐러가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한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집 나서던 그녀에게 한 말이기도 한 ‘손수건 있니?’라는 아프면서 다정한 말. 그 말은 상처에 바르는 연고이자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다. 상처가 나도 연고를 바르지 않으면 더디 아물고, 별이 아무리 빛나도 마음에 들이지 않으면 그 반짝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레오의 손수건만큼은 못되더라도, 눈물 콧물 닦을 수 있는 손수건 한 장의 안부를 물어본다. 기왕이면 헤르타 뮐러 식으로. 여러분, 손수건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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