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4일 화요일
 
포항, 울릉, 포스코,
오피니언칼럼
아느냐! 잊었느냐!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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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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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문 전 선린대 부총장

[경북도민일보]  1950년 8월 11일은 북한의 침략에 의해 포항이 적에게 함락된 날이며 비참했고 슬픔이 있고 생각하기조차 가슴 아픈 날이다.
 특히 타 전투보다 아픈 상처가 남아 우리의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8월 11일 새벽 4시경 북한군 5사단 및 766유격대 부대장 박무량이 포항시가지를 기습하기 앞서 포항여자중학교(현 포항여자고등학교)에 진격했다. 이때 이미 학교에 포진하고 있던 학도의용군 71명의 공격으로 일시 후퇴했다가 대량포격과 중무장화기를 앞세운 연대급 규모의 병력으로 재진격했다. 오후 3시경까지 약 11시간 동안 4차례의 총격전과 백병전으로 적을 200여명 사살하고 저지시켰으나 전사 48명, 부상 17명의 상흔을 남기고 점령당했다.
 이 전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단일 부대로 희생된 치열한 전투면서 전투사에 ‘기적’으로 기록되며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의 배경이 됐다.
 6·25 60주년을 맞아 2010년 6월 16일 개봉됐으며 관객수는 330만여명을 기록하고 미국에서는 2010년 7월 30일 (71: Into The Fire) 이름으로 개봉됐다.
 이 영화는 아군이나 마지막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는 해피엔딩이 아니고 인간의 가슴 밑바닥에 자리한 불안, 공포, 초조, 긴장, 갈등, 인간애, 죽음을 무릅쓴 용기가 어린 학도의용군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포항은 부산 교두보 확보와 군사적으로 육로, 철도, 해상, 오천비행장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71명의 학도의용군은 16~18세의 나이로 군번도, 군복도, 계급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현역병의 지휘관도, 지원군도 없이 고립된 상황에서 펜 대신 자신의 키보다 큰 M1 소총을 메고 싸웠다.
 이에 3사단 후방 지휘소와 포항시민, 경찰 그리고 700여척의 크고 작은 민간인 배가 빠져 나갈 수 있었으며 영덕지구에 고립된 3사단도 안전하게 구룡포로 철수해 형산강 이남에 교두보를 마련, 적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포항 수복 후 시신 수습과정에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15)의 부치지 못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1950년 8월 10일 날씨 쾌청.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팔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린 겨우 71명입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 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럼…”
 1977년 12월 15일.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가 포항여자고등학교(당시 포항여자중학교) 앞에 세워졌으며 2002년 7월 28일 전국에서 하나뿐인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세워졌다.
 포항은 워커 장군이 1950년 7월 13일 미8군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8월 3일 마산, 왜관, 포항을 연결하는 최후 방어선인 워커라인(Walker Line 해도 근린공원에 기념비가 있음) 즉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8월 11일 포항 시가지도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9월 23일까지 44일간 전투에서 워커 장군은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도, 고향도, 조국은 사라진다는 각오로 2301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증원 병력도 없이 방어에 성공해 전세 역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포항 시가지는 완전히 폐허가 됐고 수복 후 시민들은 판잣집, 움막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포항시민이나 외지 사람도 종종 산책을 하거나 관광지를 둘러 보면서 이런 민족적 아픔이 있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포항은 신시가지를 따라 차츰 삶의 모습이 변해가면서 타버린 잿더미 위에 싹이 돋아나듯 죽도시장이 형성되고 1968년 대송면 송정리 일대 모래밭 위에 일관 제철소를 짓기 위해 어떤 생명도 뿌리내리기 힘들어 보이던 230만평의 삭막한 모래사장 위에 자본도 기술도 없이 건설이 시작됐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국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건설현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청춘을 바쳐 포항종합제철, 즉 포스코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6·25 당시 약 5만여명의 조그마한 어업도시, 해병대 주둔도시, 울릉도의 출항지 이미지에서 1973년 제철소 1기가 준공돼 ‘산업의 쌀’ 이라는 철이 생산되면서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부상하고 53만여명의 경북 제1의 도시가 된 것이다.
 오늘의 포항은 인생의 고귀한 액체인 전쟁의 피와 건설 역군의 땀, 그리고 전쟁의 상흔으로 세워진 산물이다. 안병욱 교수는 ‘빛과 생명의 안식처’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위업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 값있는 일이, 땀을 흘리지 않고 대업이 실현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포항의 ‘제2의 도약’을 위해 용기, 눈물의 정성, 땀의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항 수복 후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불렀던 작사·작곡 미상의 노래 “아느냐 잊었느냐. 8월 11일. 싸운 일 생각하면 무엇을 못해. 괭이도 삽도 쥐고 지게도 져라. 내 고장 내일이라 누구에게 맡기랴. 재건이다 건설이다 모두들 나와 동해승지(勝地) 우리포항 길이 빛내자”라는 가사가 생각난다.
 우리는 오늘의 포항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의 부모, 형제, 친구의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고통을 기억하자.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고했고,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영토를 잃은 민족은 다시 살아 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다시 살아 날 수 없다”고 했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 다시 반복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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