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시 선생의 ‘돌직구 상소문’… 400년전 당쟁의 폐해를 반추하다
  • 김영무기자
권태시 선생의 ‘돌직구 상소문’… 400년전 당쟁의 폐해를 반추하다
  • 김영무기자
  • 승인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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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영양군 문화센터서 산택재 권태시 선생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
▲ 오는 27일 영양군 문화센터에서 ‘산택재 권태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영양 산택재 선생의 입암면 정자에서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 산택재 선생의 문집.

[경북도민일보 = 김영무기자]  성균관유도회경북본부(회장 안승관)는 오는 27일 오전 10시부터 영양군 문화센터에서 ‘산택재 권태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학술대회를 갖는다.
 “이미 겨울은 깊어지는데 국법이 두려워서 환곡을 갚은 자는 끼니가 끊겨 벌써부터 새 환곡을 학수고대 하고 있고, 미처 갚지 못한 자는 법에 의거해 형틀에 몸을 맡겨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데도 국법대로 환곡을 회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소인이 맡은 일개 현의 일이지만 다른 고을도 마땅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거늘 조정 대신들의 생각이 지금 여기에 미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벼슬아치들의 4색 당파싸움이 극에 달해 있었던 조선중기 숙종 16년(1690).
 당시 충청 회덕군에 갓 부임한 신임 현감은 조정에 ‘돌직구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이 처음 발견돼 세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당시 조정은 남인북인·노론소론 등 사색당파로 갈려 연일 당쟁만 벌이고 있었다.
 벼슬아치들의 민생외면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된 삶을 낱낱이 적어 직언하고 있는 이 상소문은 최근 북핵으로 급박해진 안보위기 속에서도 연일 5당 5색의 당쟁만 반복하는 작금의 정치권을 향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올해 농사는 비록 이삭이 여물었다고는 하나 심각한 가뭄을 입어 조금도 수확할 게 없다. 이곳 회덕 백성들은 베짜는 일을 업으로 하지 않기에 수확한 곡식을 반드시 포로 바꾸어 세금을 납입해야 하는데, 승수와 척도가 규정에 반드시 부합되지 못해 백성 상당수가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형벌을 받기도 합니다. 간신히 조세를 거두어 올리면 상부기관에서 ‘올이 거칠다, 자(길이)가 모자란다’해 걸핏하면 트집을 잡고 퇴짜를 놓는 통에 백성들의 고충은 다시 갑절로 늘어 납니다.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과정에서 통과세가 붙고 뇌물까지 공공연해져 그 비용 또한 조세의 부담을 두 세배로 늘여 놓습니다. 이러니 세간에서 이른바 ‘진상은 바지랑대요, 뇌물은 메고 잔다’라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입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곡, 문해문중 산택재 권태시(1635~1719).
 그의 ‘돌직구 상소문’은 최근 문중에서 산택재 문집을 번역, 국역본을 발간하면서 내용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됐다. 
 55세의 나이로 늦깎이 고을원이 된 그는 부임하자마자 탐관오리들의 오랜 학정으로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백성들의 고된 삶부터 꼼꼼하게 살폈다.
 당시 탐관오리들의 학정은 당쟁에만 몰입, 권력투쟁만 일삼는 조정 대신들의 민생외면으로 부터 기인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백성들을 위하는 뜻이야 지극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본 회덕현의 가난한 백성 가운데 신구(新舊) 환곡을 한꺼번에 갚아야 하는 부담을 못 이겨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그 사이 죽은 자도 부지기수여서 환곡상환 부담을 할 수 없는 지경이 태반인 상황입니다.”
 “양반네들은 ‘돈 꿔 달랠까봐’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으며, 평민들은 ‘무거운 세금이 무서워’ 가족을 이끌고 도피하느라 읍리가 수선스럽습니다. 민심이 흉흉해 닭과 개까지도 편안치 못한 지경입니다. 귀와 눈이 닿는 곳 마다 놀라움과 참혹함을 이길 수 없는 데도 지금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숙종 16년 이후엔 노론이 지금의 여당처럼 권력을 잡고 조정을 장악한 상황임에도 남인 출신이었던 그는 여야를 불문하고 임금과 조정대신들을 향한 직언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조정을 어지럽힌 대신들을 향한 탄식도 엿보인다.
 “오호라! 이미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이고, 사대부집에서 재물이 있는 데도 백성들을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은 큰 도적놈이 아니겠소이까. 바로 그 백성들의 피해가 벼슬아치에 그치지 않고 결국 조정과 국가에 미칠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 일인지요.”
 그는 상소문 뿐 아니라 당시 유력한 대신들에게도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중과세와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을 구할 방도를 찾아 동분서주 했다.
 “가만히 생각건대 임금과 재상이 해야 할 백성에 대한 걱정을 일개 고을원이 분수에 넘치게 해 주제넘고 경솔함이 여기에 이르렀지만 이를 감수하면서 이렇게 서신을 전달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자애로우신 대감께서 조정 군신간 경연의 자리나 조정의 국사를 논하는 즈음에서 이러한 우려를 참작하신다면 혹시라도 백성들을 선처할 방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민본주의, 애민정신이 스며있는 목민관의 글이다.
 그는 1694년(숙종 20년) 사색당쟁이 더욱 극심해 갑술환국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당쟁 중단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또다시 여러번 올렸다.
 그러나 그는 뜻이 관철되지 않자 그 길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 난진이퇴(難進易退)를 실천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가 회덕 현감 재직당시 경험을 살려 백성의 입장에서 고을 수령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목민관 지침서 ‘거관요람’은 나중에 그의 증손자 권방이 친구인 다산 정약용에게 보여 주면서 ‘목민심서’ 집필의 기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상소문을 포함한 서신 등 산택재 문집 국역본을 토대로 그의 민본주의와 애민사상을 다시금 되새기고 400년 전 사색당쟁을 반추해 오늘을 비춰 보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박영호 경북대 교수를 좌장으로, 김은종 고려대 교수와 신도환 안동대 교수가 각각 ‘산택재 선생의 임관(任官)기 상황에 대해’, ‘산택재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며 김세중 연세대 교수, 이성호 성균관 한림원 교수, 강일호 성균관유도회 부회장, 김명균 교남문화 대표 등 쟁쟁한 석학들이 토론에 나선다.
 성균관유도회 김시덕 사무처장은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산택재 선생의 드높은 애민사상과 민본주의는 요즘시대에서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면서 “선생은 고을원으로서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군주와 대신들에게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공복으로서 망국의 당파싸움을 일깨워 반면교사의 시대적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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