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서리 세대에게 바치는 ‘겨울 이야기’
  • 모용복기자
닭서리 세대에게 바치는 ‘겨울 이야기’
  • 모용복기자
  • 승인 2018.0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대나무를 잘라 반으로 쪼개 얇게 다듬어 하나는 세로로 곧게, 하나는 가로로 둥글게 휘어 창호지에 풀로 고정시킨 다음 귀와 꼬리를 붙이고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실을 매어 균형을 맞추면 끝난다.
 연날리기는 놀잇감이 부족했던 우리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겨울놀이였다. 누구 연이 더 높이 올라가나 시합을 하는가 하면 연줄이 끊어져 연이 멀리멀리 도망가버리는 날엔 밤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당겨 올려도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겨울놀이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썰매타기다.
 요즘은 지자체마다 대규모로 썰매장을 조성해 공간도 넓고 빙질도 좋으며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물이 있어 얼음이 얼면 아무 곳이나 썰매장이 됐다.
 추수가 끝난 논에 겨울비가 내려 논바닥이 얼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앞다퉈 썰매를 꺼내들고 뛰쳐나온다. 혹시 썰매가 없거나 망가진 경우엔 아버지나 형들을 졸라 껍질을 벗겨 다듬은 하얀 소나무에 굵은 철사를 대고 못질을 해 고정시킨 후 여기저기서 주워모은 판자를 붙이고 알맞게 잘라내면 썰매 하나가 뚝딱 완성된다. 그때는 썰매라 하지 않고 안장이라 부른 기억이 난다.
 썰매타기는 꼭 엄마의 회초리와 잔소리로 끝이 나는데 살얼음이 언 곳에 썰매가 빠지면서 옷을 홀라당 적셔먹기 때문이다. 옷이 귀했던 시절 엄마는 당장 내일 입힐 옷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리라.
 철이 바뀔 때마다 하나 뿐인 딸 아이의 취향에 맞춰 여러벌씩 옷을 공수(空輸)해대면서도 매일 아침 옷 걱정을 하는 아내를 보면 농사꾼의 아내로서 우리 5남매 옷 치다꺼리에 등골이 휘어졌을 어머니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온다.
 요즘 같이 추운 날이면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 그런 까닭이 아닌가 싶다. 눈밭을 뒹굴어도 마냥 신이 났지만 부모님들은 겨울나기가 여간 버거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동네마다엔 아지트가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하나둘 나와 모이는 곳. 그곳은 우리들의 긴긴 겨울밤을 반토막 내버리는 동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이 피어나는 곳이다.

 아지트는 한 곳이 아닌 주로 몇 집을 정해놓는다. 한 집에서 계속 모이게 되면 그 집 부모님의 잔소리가 걱정되고, 또 오늘은 누구집, 내일은 누구네집 하며 번갈아가며 장소를 옮겨 노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사내아이 계집아이 구분없이 한방에 빙 둘러앉아 이불을 당겨 다리를 덮고 학교 선생님이 누구와 연애를 한다거나, 없는 친구 흉을 보기도 한다. 텔리비전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 그 곳은 정보교환의 장이기도 했다. 여자애들은 가끔 떡볶이를 했다. 대파를 반솥 가까이 썰어넣고 빠알간 고추장을 듬뿍 넣어 만든 떡볶이. 지금 어디에서 그런 맛을 다시 맛볼 수 있으랴.
 내가 옛날 생각이 나 가끔 떡볶이를 만들라치면 집사람은 파와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는다고 잔소리를 한다. 그래도 맛은 인정한다.
 남자애들은 어떤 때 큰 맘 먹고-사실은 여자애들에게 우쭐대기 위해-다른 동네까지 원정 가서 닭서리를 해온다. 털을 벗겨낸 닭과 쌀을 넣고 한솥 푸짐하게 끓여내면 그날은 아지트의 부모님도 긴긴 겨울밤 공복을 채우는 날이었다.
 간혹 남자아이들만 모이는 때는 여자애들이 있을 법한 집을 찾아다니거나 일찍 집으로 돌아와 허전한 마음을 안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난한 시절 겨울은 너무 춥고 길었지만 동무들의 온기로 데워진 우리들의 겨울은 한없이 따뜻했다. 그렇게 우리는 유년을 보냈고 또 지나왔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것은, 그리고 가슴 한 켠에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힘들었기에 더 아름답고 아픔이 있었기에 성숙할 수 있었던 내 유년의 공간.
 누가 말했던가.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제 머리엔 반백(半白)의 서리가 내리고 얻는 것보다 잃어가는 것이 많아지는 나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동무들과 풍경들이 이토록 사무치는 것은 벼 베인 텅 빈 들판에 바람이 많아진 까닭이리라.
 사람의 소중함을 겨울만큼 절실히 느끼는 계절도 없다. 춥고 배고프기에 사람의 온기가 소중하고 고맙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내 유년의 추억은 대부분 겨울로 남았나 보다.
 어릴 적 함께 서리한 전리품을 가슴에 품고 논길을 가로질러 한없이 내달리던 친구 놈을 붙잡고 밤이 새도록 소줏잔을 기울이고 싶은 겨울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