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경북도민일보
소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8.02.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들으며
▲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소릿골에 닿는 동안
 턴테이블에 오래된 LP 한 장을 걸어본다. 판은 시계가 도는 방향으로 돌아간다.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검은 플래터는 아직 소리를 내지 못한다. 지구가 도는 것처럼, 우주가 도는 것처럼, 같은 주기로 제자리를 찾아낼 뿐이다. 외팔의 악사는 자신의 악기인 뾰족한 바늘을 검은 레코드의 소릿골에 올려둔다. 바늘은 바이올린 활이 현에 닿듯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동심원을 그리며 플래터를 긁기 시작한다. 두 개의 기다란 스피커에서 전류가 흐르고 있다. 공기가 튀는 소리가 난다.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 스피커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귓바퀴의 결을 따라 스며들어온 소리의 조각은 몸속 어딘가에 쌓여가고 있다.
 한 장의 LP를 듣는 일은 흩어진 시간을 수집하는 일과 같다. 슈베르트와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를 듣는다. 밥 딜런과 비틀즈를 듣는다. 쳇 베이커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듣는다. 그들의 음악을 잠시 몸 안에 가둬둔다.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고 마더 테레사가 말했다. 태초의 기도, 태초의 시, 태초의 노래를 듣는다. 파도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드넓은 바다에 젖어들 수 있다. 이 검은 비닐의 동심원을 따라서 옛날에 젖어든다. 슈베르트가 살던 시절의 풍경을 눈앞에 펼쳐내기란 쉽지 않다. 그가 곡을 쓰며 느꼈을 괴로움과 우울을 그리고 기쁨과 환희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오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음표들이 자라난다. 바늘은 내 몸의 소릿골에 닿아 과거를 긁어대고 있다.

 -오르페우스, 오디세우스, 그리고 부테스 

 슈베르트를 고른 것은 순전히 커버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의 구분 없이 온통 짙은 청색으로 칠해둔 표지에 눈길이 갔다. 넘실거리는 파도 위로 거대한 물고기가 숨을 몰아쉬듯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벌어진 아가리는 깊은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귀를 닮은 형상이다. 심각한 표정의 가오리나 파충류 얼굴을 한 정체모를 생명체도 수면 위로 올라와 있다. 비늘의 결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의 파도처럼 거칠다. 이들은 연회라도 가지려는 듯 얼굴을 한데 들이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고뇌에 빠진 인간이 벌거벗은 채로 무릎을 꿇고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세이렌의 노래에 키타라 연주로 맞선 오르페우스일까, 제 몸을 묶고 죽음의 노래를 들으려 했던 오디세우스일까. 밀랍으로 된 귀마개를 벗고 바다에 몸을 던져버린 부테스인 건 아닐까. 음악은 생(生)과 사(死)의 전령들이 서로를 유혹하는 목소리다.

 -슈베르트 현악 4중주곡 제14번 D단조 ‘죽음과 소녀’
 D단조, 4/4박자인 제1악장 알레그로(Allegro)는 현악 4중주의 완벽한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의 곡이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가 이뤄내는 활과 현의 마찰이 날카로운 긴장을 유지하며 마치 베토벤 제5교향곡 ‘운명’의 제1주제를 상기시킨다. 비장한 꿈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다. 서로가 이야기하는 듯 속삭이다가도 모른 척 성큼 멀어진다. 소리의 결을 따라 가다보니 어느새 제2악장에 닿는다. G단조 2/2박자의 안단테 콘 모토(Andante con moto)는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만큼이나 아이러니한 구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적막한 현의 움직임이 귓불을 은근히 당겨댄다. 음들은 박자에서 밀려나듯 들리지만 그 위치를 잃지 않는다. 마치 죽음(의 형상)과 소녀가 서로의 몸에 의지한 채 이끌어나가는 무도(舞蹈)처럼 한발을 밀어 넣으면 상대의 한 발은 빠져버린다. 밀고 당기는 묘한 순간에도 현들은 흔들림 없이 제 음을 찾아나간다. “나의 음악은 고뇌에서 나왔고 그 괴로움 속에서 쓴 작품은 사람을 즐겁게 하였다.”라고 슈베르트는 일기장에 쓴다. 슈베르트가 27살이 되던 1824년 3월에 착수하여 1826년 1월에 완성한 이 곡은 자유롭지만 폭발적인 흔들림이 감지되는 곡이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 나는 턴테이블에 이탈리아 4중주단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올려둔 채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한 소녀의 얼굴을 상상한다. 꿈속에서 소녀는 죽음과 만난다. 죽음의 그림자가 뱀처럼 유연하게 소녀의 몸을 휘감고 있다. 소녀를 죽이는 건 무엇도 아닌 시간이다. 시간이 육체를 장악한 이후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게 된다. 소녀는 한 시기만, 한 순간만 소녀일 뿐이다. 부드러운 피부, 떨리는 눈꺼풀, 연한 입술, 두둑한 콧방울, 주름 없는 맑은 인중이 죽음을 밀어낸다. 죽음과 소녀는 서로를 마주한 채 어둡고 조용한 박자를 밟고 있다. 2악장이 끝나자 톤암이 올라가고 돌고 있던 플래터가 멈춘다. 나는 먼지덮개를 들어 올리고 판을 뒤집는다. 다시금 외팔의 악사는 뾰족한 바늘 끝을 소릿골 위에 부드럽게 놓아둔다. 소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아직 3악장은 시작되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