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보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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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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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테일러의 'JT'를 들으며
▲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그런 목소리가 있다
그런 목소리가 있다. 볕도 바람도 소용없이 조용히 내면을 바라보게 되는. 일찍이 빌리 홀리데이가 그랬다. 어느 날에는 쳇 베이커가 무심한 듯 지독하게 다가왔다. 비가 오는 날에는 김광석이, 바다 앞에서는 이소라가 마음을 두드렸다. 이들은 귀를 할퀴지 않았다. 몸을 짓이기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안을 살피다 돌아갔다. 어느 때고는 허락 없이 며칠을 머무르기도 했다.
그런 목소리도 있다. 무엇이든 피어오르게 만드는. 미소도, 향기도, 사랑도, 행복도. 꽃을 피우는 건 봄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봄을 닮은 목소리, 당신을 닮은 목소리.
제임스 테일러가 내게 왔다. 나는 오래도록 스피커 앞을 떠나지 못했고, 좀처럼 묘한 기분에 와인을 한 잔 마셔야만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처음으로 기타를 안았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 감정을 기억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그날의 공기와 온도와 날씨를 점친 뒤라도 결코 간단치만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열다섯 살 나의 감정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미 세상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물들인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러다보면 나를 지배한 세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를 물들인 건 오직 당신의 목소리였다. 당신을 물들인 건 나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이후로 인류는 타락이 아닌 진보로 나아갔다. 한 철학자는 고귀한 의식에서 비천한 의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목소리의 성취라고 부르고 싶다. 그 성취의 행진에 깃발을 든 사내가 있다면 나는 제임스 테일러의 얼굴을 떠올려 보겠다. 그가 히피를 통과한 포크 가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래도록 마음의 병을 앓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우울도 행복도 가늠할 수 없는 보통의 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나를 온통 물들인 건 그저 보통의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당신의 친구다

반전 시위와 자유의 열망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1960년대를 거친 히피들에게는 그들의 자발적인 일탈이 가져온 두려움을 어루만져줄 목소리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히피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캐롤 킹이 작사 작곡한 “You‘ve got a friend”를 제임스 테일러가 71년에 부른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나는 당신을 만나러 가겠어요. 당신에게는 친구가 있어요. 멋진 친구가 있는 거예요.’ 제임스 테일러는 77년 그의 멋진 얼굴을 커버로 쓴 앨범 <JT>에서 “Handy man”이라는 곡을 발표한다. ‘만약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길 원한다면 나를 불러주세요. 나는 당신의 수리공이에요.’ 이내 미국 사회는 이념과 투쟁보다는 자아의 실현에 보다 관심을 둔다. 어떤 연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약물중독과 정신병원의 투병생활로 오래도록 고통 받았다. 짐작해보자면 그의 앨범 중 어떤 곡도 자신을 위로하는 구절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신에게는 수십 년이 지나도 당신을 사랑해줄 수많은 팬들이 버티고 있는 데도 말이다.

△보통의 하루
나는 <JT>의 마지막 수록곡인 “If I keep my heart out of sight”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가 네 번이나 잇따라 말하는 I love you라는 주문이 연약해보여서일까. 더없이 강해 보이려는 그 마음이 애처로웠던 걸까. 아니면 연약하고 애처롭지만 기어코 해내는 그 사랑의 고백에 응원을 보내고 싶어서일까. 통기타의 여린 아르페지오와 섬세한 터치, 건반의 맑은 톤과 정직한 드럼은 소박하지만 세련된 조화를 이룬다. 특히 전주와 간주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하지 않은 기타 솔로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연주보다도 아름답다.
하지만 제임스 테일러가 말하듯 그 어떤 것도 전부는 아니다. 목소리도, 멜로디도, 기타의 연주도, 그가 불러냈던 세월의 흔적도. 음악은 단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러가는 공기일 뿐이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만질 수 없지만 즐길 수 있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한 보통의 공기일 뿐, 무엇도 아니다.
와인 잔은 어느새 비어 버렸고, 턴테이블은 회전을 멈추었다. 제임스 테일러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보통의 하루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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