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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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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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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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 소장

 아내는 가끔 20대로 다시 돌아가면 무얼 하고 싶냐고 제게 물어보곤 합니다. 50년 이상을 살아 오면서 마음에 회한들이 쌓여서인 것 같습니다. 똑같이 공부했는데 결혼 후 직장 그만두고 밥솥이랑 애 둘과 평생을 보냈으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 회한들이 아내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낮에 열심히 활동하고 밤에 꿈을 꿉니다. 낮에 활동하면서 쌓인 찌꺼기가 꿈에 나타납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본 마음 메커니즘으로 이를 일컬어 ‘낮의 잔재(day residue)’라고 합니다. 이 잔재는 낮과 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통틀어서 도도한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생 전반기에 충족되지 않은 소망이 인생 후반기에 영향을 줍니다. 충족되지 않은 소망이나 강한 충격이 무의식에 남아 한 사람의 성격을 만들듯이, 인생 전반기의 잔재가 후반기 인생을 왜곡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런 상처 때문에 창 없는 집을 만들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작가가 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송은경 번역)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귀족 가문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말년(1956년)에 6일간 생애 첫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입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도 볼 만합니다. 여기서, 남아 있는 나날이란 인생 전반기를 살아 오면서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회한과 미련이라는 뜻입니다. ‘젊은 그날의 잔재’라고 말하면 더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스티븐스는 집사일에 충실한 게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행사를 치르느라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마음에 둔 켄턴 양에게조차 따뜻한 관심을 주지 못해 결국 켄턴 양이 다른 남자를 만나 저택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런 충실한 삶에도 불구하고 여행 내내 스티븐스는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걸었는지 반추합니다.
 자신이 모셨던 주인이 친 나치 외교정책으로 의도치 않게 매국적인 행동을 하다 보니 그 주인을 모셨던 자신도 오해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랄 데 없는 품성을 가진 주인이라 스티븐스의 갈등은 커집니다. 그뿐 아니라, 마음의 심연에는 켄턴 양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편지에 써 놓았기에 혹시 다시 함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스는 벤 부인이 되어 버린 켄턴 양을 만납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이별을 몇 분 앞두고도 스티븐스는 속말을 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합니다.
 이때 켄턴 양이 마지막 고백을 합니다.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 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라고. 스티븐스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가 극에 달했고 카오스 그 자체가 됩니다.
 켄턴 양과 헤어지고 그런 극도의 긴장에서 저녁 선창가를 걸을 때 한 노인이 말을 걸어 옵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젠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요”
 스티븐스는 깨닫습니다. 인생은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고. 그리고 선창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모르면서도 농담들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인생은 저렇게 농담을 하며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택에 돌아가면 새로운 주인에 맞는 농담을 연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자신의 남아 있는 날들과 화해합니다.
 자동차가 달리면 매연이 나오듯이 오랜 세월을 달리면서 우리에게는 삶의 잔재들이 쌓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삶의 잔재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깊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 잔재가 평생 우리를 사로잡고 왜곡하기도 합니다. 불꽃이 번쩍 튀더라도 그 옆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걸로 끝납니다. 하지만 옆에 휘발유 통이 있으면 폭발하게 됩니다. 잔재들은 노후에 휘발유 통이 됩니다. 그래서 잠도 잘 못 자고 우울증을 앓기도 합니다. 낮의 잔재들과 먼저 화해하고 휘발유 통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대인관계를 넓히고 햇볕도 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는 말들을 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만 우선 나를 긍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긍정해야 사람도 만나고 밖에도 나가고 싶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의 잔재를 긍정하기 위해서, 선가(禪家)에서는 관점만 바꾸면 된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에 생사를 걸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는 해야 합니다. 낮의 잔재와 화해하고 전반기의 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젊을 때의 삶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 필요합니다. 성찰이 필요하며, 노후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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