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남사람의 욕망을 키웠던 출세 길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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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영남사람의 욕망을 키웠던 출세 길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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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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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아름다운 마을길-<6> 문경새재 길
▲ 문경새재의 색다른 볼거리인 드라마 촬영장.

[경북도민일보]  조선시대 하나의 길이 교통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길이 있다. 바로 문경새재 길이다. 문경새재는 말 그대로 새도 힘겹게 넘었다고 해서 새재라 하였다. 한자로 조령(鳥嶺)이라하였고, 새(新) 길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과거에는 억새가 무성해 초점(草岾)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명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좁고 험준한 새재 길은 어두워지면 혼자 넘을 수 없는 길이었다. 문경새재 길은 삼국시대부터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역사적 사실과 얽힌 여러 설화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한양을 가장 가깝게 잇는 여섯 대로의 체계를 정비하면서, 동래에서 가는 가장 빠른 한양 길로 개척되어 영남대로라 불려졌다. 로마 몰락은 잘 정비된 길이 한몫했듯이, 임진왜란으로 한양이 빠르게 함락된 원인도 길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새재에 성을 쌓아 방비를 해야 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주력부대가 새재를 저항 없이 통과하면서 조선의 명장 신립은 탄금대에서 달천을 등지고 이들과 맞서 싸웠지만 대패하였다.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 길에 오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약 신립이 문경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결전을 벌였다면 임진왜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을지 모른다. 혹독한 전쟁을 겪은 뒤 새재를 요충지로 설정하고 가장 먼저 세운 관문이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다. 조곡관은 1594년 새재에서 가장 비좁고 산세가 험한 곳에 세워졌다. 숙종 때에는 새재 정상에 있는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세워졌고, 새재 초입에 있는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가장 늦게 세워진 관문이다.
 새재 길은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과거 길은 세 개 뿐이었다. 영주와 단양 사이에 있는 죽령(竹嶺)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영동과 김천 경계인 추풍령을 넘으면‘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진다고 믿었다. 문경새재로 통하면 문경(聞慶) 즉, ‘경사를 듣게 된다.’하여 이곳을 넘었다고 한다. 굳이 지명과 연관시켜서까지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던 이유는 과거에 급제해 입신양명하는 것이었다. 당시 과거급제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정구선은 ‘조선의 출세길, 장원급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과는 744회 실시되었고 급제자는 1만462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가 163회 실시 6063명 합격, 별시를 비롯한 부정기시험이 581회 실시 8557명이 합격했다.”고 한다. 과거 1회에 평균 19명 정도가 급제하였다. 요즘 국가공무원시험과 비교하면 과거급제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문경새재 길은 조선의 사회적정서가 투영된 곳으로 영남지역 사람들의 출세욕에 부응했던 길이다. 정치 길, 과거 길, 장사 길로서 힘들여 오르면 누구나 기회의 땅에 닫을 수 있는 공평한 길이었다. 환희와 좌절이라는 엇갈린 운명에서 고향 길마저 오던 길로 갈 수 없었던 비애의 길이기도 하였다.

▲ 전국의 모든 아리랑 노랫말을 전시하고 있는 옛길박물관.

 - 선비도 장사치도 새재 길은 문경 아리랑 고개
 문경새재 길은 사계의 풍광이 뛰어나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곳이다.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의 경계를 넘어가는 세 개 관문으로 되어 있다. 제1관문에서 제2관문까지는 3㎞, 제2관문에서 제3관문까지는 3.5㎞, 총 6.5㎞로 15리 조금 안되게 걷는 길이다.
 문경새재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나이 지긋한 선비의 상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새재 길이 과거 길로 알려지면서 선비 길로 상징되었다. 이왕이면 괴나리봇짐에 짚신 몇 켤레 매달아 짊어진 젊은 선비가 더 실감나지 않았을까. 소나무로 멋스럽게 정원을 가꾼 웅장한 한옥이 보인다. 옛길박물관이다. 이곳은 새재를 넘나들던 옛사람들의 이야기와 새재 길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문화물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1층에는 서예가 120명이 2년간 문경전통한지 7000장에 쓴 전국의 아리랑 노랫말 1만68수를 전시하고 있다. 옛길박물관을 뒤로하고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길로 걷다보면 왼편으로 문경새재자연생태공원이라 쓴 간판이 걸음을 유혹한다. 오래된 하천을 그대로 살려 공원으로 조성한 친수공간이다.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수변을 따라 탐방로가 설치되어 있어 다양한 동식물을 만날 수 있다. 단풍나무 터널 길이 끝나는 지점에 문경새재라 적힌 표지석이 나타나고 그 뒤로 제1관문인 주흘관이 조령산과 주흘산 골짜기를 성벽으로 막고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관문 앞을 가로지르는 빈 해자(垓子)가 탄금대에서 전몰한 8000의 조선군처럼 느껴져 애잔하다. 주흘관을 통과하면 성내에 걸린 현판에는 영남제1관으로 되어있다.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오른편 등성이로 난 계단에 오르자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광장이 나온다. 경북의 23개 시군이 참여한 이 타임캡슐은 2396년에 개봉한다. 새재 길을 따라 걷자 길옆으로 길게 늘어선 비석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관찰사, 현감 등 모두 이곳을 거쳐 간 관리들의 송덕비이다. 맞은편 다리로 연결된 숲으로 수많은 한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바로 KBS 드라마 촬영장이다. 이곳에서 왕건, 장사의 신, 마녀보감 등이 촬영되었다. 나무그늘 좋은 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발을 담그고 있다. 걷기에 지친 여행자들이 맑은 물에 발도 담그고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다.
 

▲ 문경새재 길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난 제2관문 조곡관.

 - 민중의 애절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새재 길 돌탑
 가지런히 돌을 쌓은 조산(造山)이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골맥이 서낭당이라 부른다. 마을 입구나 경계에 세워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다.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가 길을 향해 흘러내릴 듯 중턱에 걸려있다. 지름틀바우라 부르는 이 바위는 옛날에 사용했던 기름 짜는 틀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자 성벽처럼 돌을 높이 쌓아 만든 기이한 형태의 구조물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조령원터라 불리는 곳이다.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새재 길에는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이 있었는데 현재 터만 남아있다. 출입구는 거대한 판석을 올려 어떠한 침입도 막을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새재 길 도적떼는 낮에도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도적질했다. 소나무 숲에는 타원형의 넓적한 바위가 나오는데 마당바위라 부른다. 바로 이 바위가 도적들이 숨어 있던 곳이다. 새재 길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도적이 많았다. 1508년 3월 5일자 실록에는 “백주에 떼를 지어 통행을 차단해 약탈하고, 마을에 침입한 도적떼가 두려워 손님 접대하듯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새재 길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주막이다. 아침에 길 떠난 과객도, 어두워 갈 수 없는 과객도 주막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사리나무 엮어 담장을 두른 초가 앞에는 이곳 주막에서 묵은 선비들의 글귀가 여정의 피로를 공허한 마음으로 적고 있다.

 묘하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가지를 뻗어 손님을 맞이하듯 교귀정을 향해 안내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임 경상감사와 후임 경상감사가 업무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교인처이다. 교귀정 앞 계곡에는 제2관문인 조곡관 축성 당시 사용하였던 용추샘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용추샘 위로 펼쳐진 계곡의 풍광이 장관이다. 이곳을 다녀간 퇴계 이황은 이렇게 적었다. “큰 바위 힘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네, 산속의 물 내달아 흰 무지개 이루네, 성난 듯 낭떠러지 입구 따라 떨어져 웅덩이 되더니 그 아래엔 먼 옛적부터 이무기 숨어있네…….” 퇴계는 계곡 웅덩이에 용이 살았다하여 이 곳을 용추(龍湫)라 하였다. 한여름에도 새재 길은 시원하다. 길 좌우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어 좀처럼 햇볕이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가파르지 않은 평평한 흙길은 딛는 느낌도 좋아 걷기에도 편안하다. 새재 길을 오르다보면 곳곳에 돌탑이 눈에 띈다. 조산과는 형태부터 다르다. 과거급제를 위해, 돈 많이 벌기 위해 길 주변에서 작은 돌을 구해 쌓은 돌탑들이다. 돌 하나가 한사람의 염원이다. 거대한 소원성취탑은 그 시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애달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산불됴심이라 새겨진 표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심을 됴심으로 표기한 것으로 봐서 영조 또는 정조 쯤 세워진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어로 된 순수한글 비석이란다. 조곡폭포는 생경함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곳이다. 평범한 길가 바위적벽으로 인공 폭포처럼 어눌하게 내려온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쯤 잠시 쉬어가도 좋을 숲속 적당한 공간에서 휴게소가 빠끔히 고개를 내민다. 휴게소에서 출발하면 얼마 걷지 않아 제2관문인 조곡관이 나온다.
 

▲ 조선시대 전·후임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교귀정.

 - 조령계곡 풍광은 과거 길도 잊게 한 도원경
 조곡관은 조령협곡의 좁은 지형을 활용해서 성을 쌓은 천혜의 요새이다. 조령교를 넘어 관문을 지나자 고즈넉한 세계가 펼쳐진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숲을 이룬 이곳은 큼직한 바위가 바닥에 즐비하다. 골짜기 전체가 크고 작은 바위로 된 계곡으로 얕은 물이 흐르고 계곡 한쪽에는 생긴 대로 돌을 쌓아 만든 약수터가 고졸한 멋을 이룬다. 풍광에 취하면 양반의 체면도 거추장스럽다. 도포자락 젖혀 묶고 계곡에 발 담그면 새소리 바람소리에 과거 길도 잊게 했던 도원경이 이곳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숲속에서 여유롭다.
 발길을 옮겨 제3관문인 조령관을 향하다보면 고인돌처럼 넓적한 바위가 굴을 만들어 놓았다. 성인 두서넛은 충분히 들어갈 만큼 넓은 바위굴이다. 비를 만나면 바위굴에서 피해 갔다고 한다. 남녀가 이 바위굴에서 인연이 되어 아비 없는 자식을 낳게 되고, 아이가 자라 아버지를 찾아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령관이 가까워지자 낙동강 발원지라 적힌 안내판이 나온다. 문경초점은 나지막한 골짜기에 둥글게 돌을 쌓은 얕은 웅덩이로 되어있다. 이곳이 영남의 젖줄 낙동강의 기원이다. 낙동강 발원지를 뒤로하고 조금만 오르면 샛길에 금의환향길이라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문경새재 길에서 희비가 나뉘는 길이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이 길을 통해 고향으로 가게 되는데 일명 출세 길이다. 반면 대다수 떨어진 선비들은 낙방 길을 통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금의환향길을 지나자 문경새재 길의 마지막 지점 제3관문인 조령관이 눈앞에 나타난다. 넓은 잔디광장 끝으로 길지 않는 성벽을 드러내며 초연하게 서있다. 여기까지가 문경새재 길이다. 조령관문을 통과하면 충청북도 괴산군이다.

 

김용진 작가

경북문인협회 회원, 디자인학 박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지역문화콘텐츠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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