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와 경제강국 독일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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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와 경제강국 독일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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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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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경북도민일보 = 뉴스1] 요즘 정부가 ‘국가주의’라는 비판을 들어가면서 열심히 펼치는 경제정책을 보노라면 새삼스럽게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가 떠오른다. 리스트는 칼 마르크스와 함께 세계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독일 경제학자다. ‘정치경제학의 국가적 체계’라는 명저를 남겼다. 보호무역주의자, 국가경제주의자로 인식되어 당대를 풍미했던 자유주의자 영국의 아담 스미스와 대비되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만 19세기 독일의 부상에 큰 이론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알려진다.
리스트에 따르면 가장 기초적인 경제주체는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국가다. 기업인과 정치인은 ‘협치’를 통해 국가의 이익을 구현해야 할 의무를 진다. 독일이 1870년에 도입한 주식회사의 복층 이사회 제도를 통해 기업에 대한 국가와 종업원 대표의 영향력 행사를 제도화한 것도 그 맥락이다. 이는 결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독일 경제의 특성으로 연결된다. 독일 최대의 기업 크루프(Krupp)는 1850년대에 이미 기업 차원의 연금과 건강보험을 도입했다.
역사적으로 별 존재감이 없던 독일이 강대국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독일은 1871년에 통일이 된 후 대영제국을 따돌리고 유럽의 경제 강자가 됐다. 당시의 ‘신경제’ 국가로서 전 세계를 상대로 두 번이나 전쟁을 벌일 만큼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산업생산력을 갖출 수 있었다. 전기, 기계, 화학 모든 분야에서 필적할 나라가 없었고 크푸프는 2만 명을 고용했다. 크루프는 병원과 학교도 갖추었는데 영국에는 그런 기업이 없었다.
당시 독일 경제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이념에 터 잡았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역할이 중요했고 미국과 영국의 경제와는 다른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그때 벌써 경쟁의 제한이나 독점금지 같은 개념이 법제화되었지만 독일에서는 카르텔이 금지되지 않았다. 1905년 현재 독일에는 385개의 카르텔이 결성됐다. 담합과 주식의 상호소유는 협력의 상징이어서 국가경제 전체에 유익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결국 1925년에 독일 6대 기업이 아예 합병해서 유럽 최대기업 IG 파르벤(IG Farben)이 탄생했고 히틀러의 전쟁 수행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은행들도 일반 기업들의 주식을 대량 보유하면서 기업을 다각도로 지원했다. 우리의 주거래은행 개념보다 몇 차원 높은 ‘하우스뱅크’ 시스템이 탄생했다. 정부는 중앙은행 재할인율 정책을 통해 은행에 무한대의 유동성을 공급했고 독일 기업들은 자본시장의 필요 없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썼다. 독일 은행들은 독일 경제의 기초체력인 중산층(Mittelstand)의 육성에도 공헌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도 이른바 ‘국가주의’라고 불리는 생각에 기초해서 경제정책과 기업정책을 펼쳐야 할까. 국가주의도 물론 독일의 국가적 역량에 크게 기여했겠지만 정작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진다. 피터 드러커는 독일의 부상은 1840년대에 제도적으로 시작된 과학과 기술교육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독일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인(Meister)을 양성하는 기술도제교육제도가 있는 나라다. 또, 공대를 중심으로 대학들이 기업과 기꺼이 협업했고 인력을 공급했다. 1872년에 뮌헨대학은 영국 대학 전체보다 많은 수의 화학전공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1900년에 독일은 미국과 거의 동시에 경영대학을 시작했다. 독일 기업들은 사내 연구소 설립을 시작했는데 아직도 독일에서는 거의 모든 신기술이 기업연구소에서 나오고 기업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독일의 각 사업장에서는 관리직이 기술직보다 딱히 큰 우대를 받지 않았고 의사결정에서 상호 협업이 원활했다. 독일 기업들은 기술직 출신을 대거 고위 관리직에 임명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것이 장교와 사병을 크게 차별하지 않는 독일군의 조직으로 이어져 1차 대전 때 독일군의 강점이 되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나치는 노조를 파괴했지만 기업 내 각 단위가 원만히 협조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 강화했다. 
한편 독일 사회는 공무원과 기업인에 같은 레벨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 영국에서는 가장 고위직의 경영자들 조차 회사의 종복(Servant)이라고 불리던 시절이다. 독일에서는 기업의 하위 관리직도 ‘민간 공무원’이라고 불렸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미켈트웨이트가 쓴 ‘The Company’라는 책을 보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의 급부상은 국가주의에 그 배경을 둔다기보다는 기술 교육과 기업활동을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에 배경을 두는 것 같다. 정부가 지나치게 열심히 경제와 기업에 간섭(지도와 지원)하는 것은 겉보기와 달리 독일의 성공 배경이 아니다.
정부는 오히려 이공계 소외를 초래한 혼란한 교육현장을 정비하고 기업인 홀대와 공무원 선호 풍조를 불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독일 역사가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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