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호젓함 묻어나는 청도 운문사서 한걸음 쉬어보자
  • 최외문기자
자연의 호젓함 묻어나는 청도 운문사서 한걸음 쉬어보자
  • 최외문기자
  • 승인 201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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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솔바람 둘레길 총 6.35km 조성… 청정자연 속 산책코스로 ‘인기몰이’
▲ 운문사 전경.

[경북도민일보 = 최외문기자]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쳤을 때, 내 몸 하나 뉘어 쉴 곳 없을 때, 자연을 찾게 된다.
 자연의 호적함이 묻어나 청도 운문사. 바람도 쉬어가는 그곳을 거닐며, 지리멸렬한 일상을 달래보자.

 △ 천년고찰 운문사 둘레길
 운문사 솔바람 둘레길은 천년고찰 운문사의 입구에서 사리암까지 총 6.35km의 조성된 길로써 주변에는 큰 소나무숲,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청정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힐빙코스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매표소 입구에서 운문사까지 솔바람길은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주위에 빽빽이 있으며 소나무 그늘 아래엔 9~10월에 만개하는 꽃무릇이 식재되어 있어 가을에는 장관을 이룬다.
 봄철에는 맥문동, 팬지 등 야생화를 가로변(2000평)에 식재하여 따뜻한 봄을 전하는 전령사의 역할을 다하여 찾는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운문사에서 사리암 주차장까지의 둘레길은 소나무숲 사이에 계곡을 따라 데크로드를 설치해 맑은 물소리, 새소리 등 자연의 조화로운 소리를 듣고 소나무숲 솔바람의 청정한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할 수 있어 더욱 인기가 높다.

▲ 운문사 매표소에서 사림암까지 6.35km에 달하는 운문사 둘레길.


 △ 운문사 이야기1-채헌의 ‘호거산운문사사적’
 운문사의 솔바람 둘레길은 운문사를 배경으로 구성된 것으로 운문사의 탐방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운문사는 평평하고 너른 대지 위에 수십 채 기와집이 들어앉았다.
 이른바 평지가람이다.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 그리고 이들이 이룬 높고 낮은 봉우리가 돌아가며 절을 감싸안고 있다.
 운문사는 앉음새가 특이하다. 모든 건물이 돌아앉았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산세를 따르다 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사람은 운문사의 뒷모습부터 보게 되는 셈이다.
 풍수적으로 풀면 호거산을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다.
 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또 북향하면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어 재화나 부와는 인연이 멀게 된다고도 한다.
 풍수에서 물은 곧 재화를 뜻하니 항상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면 낭패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향한 집이 사람 살기에 좋은 것이다.
 이러한 터전에 절이 들어선 것은 멀리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숙종 44년(1718) 채헌이라는 스님이 쓴 ‘호거산운문사사적’에 의하면, 지금의 운문사에서 5리쯤 떨어진 금수동에 들어와 3년을 수도하여 득도한 어느 도승이 고구려 평원왕 2년(560) 도우 10여 명과 함께 갑자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 오갑사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가운데 자리잡은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 9000보 지점의 가슬갑사, 남쪽 7리쯤에 있던 천문갑사, 서쪽 10리에 자리한 대비갑사, 그리고 북쪽 8리에 위치한 소보갑사 등이었다.
 이 가운데 대작갑사가 오늘의 운문사다.
 그밖에는 대비갑사만이 대비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다른 절은 모두 없어졌다.
 ‘운문사사적’은 운문사의 첫번째 중창자로 원광 법사를 들고 있다. 가슬갑사에서 두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려준 바로 그 스님이다.
 그 내용은 591년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법사가 처음 3년 동안 대작갑사에 머물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이후 운문사의 사정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후삼국의 어지러운 전란 속에서 다시 역사 위로 떠오른다.

 ‘운문사사적’에서 두번째 중창자, ‘삼국유사’에서 개산조로 꼽는 보양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삼국유사’는 그 전설적인 얘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로 서해를 건너자니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청하여 금빛 비단 가사한 벌을 주면서 그의 아들 이목(璃目)을 데리고 가 작갑에 절을 지으라고 당부했다.
 보양스님이 절을 세우려고 북쪽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니 산 아래 5층 황탑이 보였다.
 그래서 내려와 찾아보았는데 아무 흔적도 없어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그러자 용왕이 ‘작갑’, 곧 ‘까치곶’이라 한 말이 떠올랐다. 다시 내려와 그곳을 파 보니 무수한 벽돌이 묻혀 있었고, 마침내 그 벽돌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은 게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이보다 앞서 보양스님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추화의 봉성사에 머물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의 무리들이 견성에 웅거하여 거만을 부리는 통에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왕건이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묘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무릇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는 않습니다.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보양스님이 이곳에 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듣고 오갑의 땅 500결을 절에서 부치도록 했으며, 태조 20년(937)에는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고려왕조의 창업에 군사적으로 한몫을 거들어 사세를 키운 운문사는 이윽고 원응국사 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인종이 즉위하던 1122년 왕사의 자리에 오른 스님은 인종 7년(1129) 운문사로 들어왔다. 이때 나라에서는 신수와 신원 등의 토지 200결과 국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귀속시켜 만세토록 향화를 받들게 했으며, 스님이 운문사를 중창하자 ‘운문선원상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절은 나라의 500선찰 가운데 제2선찰이 됐다.

▲ 꽃무릇이 식재돼 있는 둘레길.

 
 △ 운문사 이야기2- 일연의 ‘삼국유사’
 몽골의 간섭기가 시작되는 1277년 운문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스님을 맞이하게 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이다 이미 72세의 노경에 든 스님은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떠날 때까지 운문사에 머물며 민족의 문화유산 ‘삼국유사’의 집필에 힘을 쏟았다.
 4비 가운데 행적비가 바로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불행스럽게 이 또한 전해지지 않으니 운문사에서 스님의 자취가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삼국유사’가 전해지는 것만도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이후 운문사의 내력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조를 넘기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개의 사찰들이 그러하듯 임진왜란의 병화를 면하지 못한 듯하고, 그뒤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20세기를 맞고 일제강점기를 넘겼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운문사에는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으며, 차츰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어 오늘날은 언제나 200명 이상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수도하는 비구니들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 운문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절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의 중간쯤, 범종이 걸린 이층누각의 아래가 정문이며 첫문이자 마지막문이 된다. 이만한 규모의 절에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조차 앞도 뒤도 아닌 허리쯤에 위치한 점도 의아스럽다.
 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이 절의 서쪽을 감돌아 흐르는 계곡, 약야계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이 길의 오른편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비로전, 만세루, 그밖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왼편으로는 2기의 석탑과 오백전, 작압전, 관음전, 기타 몇 채의 전각이 나란하다. 운문사의 예배공간이자 신앙공간이다. 그 나머지 건물군은 일상생활과 수행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수행공간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것은 예배공간까지이다.
 운문사에는 당시 사찰의 중창과 내력을 기록한 원응국사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1277년에는 일연선사가 운문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들어서 불교가 쇠퇴하고 임진왜란 때는 사찰의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현재 대웅보전(보물 835)·작압전·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만세루·관음전·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193호인 금당 앞 석등, 보물 제208호인 동호,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 보물 제678호인 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97년 승가대학원이 개설됐다.
 운문사 반경 6km이내는 가볼만한 곳이 청도신화랑 풍류마을, 운문댐 하류보 유원지,청도베이스볼파크, 운문산자연휴양림,공암둘레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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