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지하철을 타고 온다
  • 모용복기자
영웅은 지하철을 타고 온다
  • 모용복기자
  • 승인 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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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경북도민일보]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양손에 쌍권총을 들고 성냥개비를 입에 문 갱스터. 1986년 개봉된 영화 ‘영웅본색’에 등장하는 주윤발의 모습이다.
오우삼 감독의 이 영화는 1997년 1월 1일부로 중국 반환이 결정된 홍콩 사회 내부의 불안감과 남자들 사이의 우정과 의리, 배신과 증오를 다룬 갱스터영화다. 현란한 총격전, 감상적인 음악, 강한 대비의 조명 등 홍콩누아르를 대표하는 특징들은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액션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서 패배한 영웅상으로 그려진 주윤발은 이 영화로 당시 한국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었으며 이후 홍콩과 미국을 넘나들며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했다. 도신, 도협, 와호장룡, 황후花, 캐러비안의 해적, 방탄승 등 유수의 영화들에서 활약을 펼치온 그가 한동안 모습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최근 들어 지하철에서 그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60대의 나이에도 청바지 차림에 팬들과 격의없이 셀카를 찍으며 어울리는 모습은 한 때 카리스마 넘치던 세계적인 스타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혹시 인기가 시들해져 빈털터리가 된 것일까? 이런 의문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인터넷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보니 온갖 선행과 일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통 큰 기부였다. 2000억원대의 자산가인 그가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기부 이유에 대해서는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살아생전에 무소유(無所有)를 몸으로 설파하신 법정 스님이 살아 계시다면 친구 하자고 하실 법도 하겠다. 요즘 같은 물질만능시대에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대스타가 온갖 호사와 화려함을 버리고 무소유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연예인은 무소유와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팬들의 사랑과 관심, 인기와 돈이 없으면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팬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스타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나가는 경우를 무수히 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욱 악착같이 일을 하고 돈을 모으려고 혈안이다. 머지않아 닥칠지도 모를 그 때를 대비하기 위해.

혹자는 ‘60대의 주윤발이 돈을 벌 만큼 벌어보고 쓸 만큼 써봤으니까 이제 사회에 내놓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하지만 평소 그의 행적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노키아 휴대폰 1대를 무려 17년 동안이나 사용해오고 있다. 또한 한 달에 10만원 남짓한 용돈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일반인도 흉내내기 힘든 검소한 생활이다. 이 뿐만 아니다. 그가 입는 옷들은 명품과는 거리가 먼 시장에서 싼값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한다. 요즘은 연예인이 아니라도 웬만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유명 브랜드로 치장하는 것이 유행인지라 그의 이런 생활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돈도 많은 주제에 말이다.
검소한 생활도 대단하지만 그의 말이 더 걸작이다. 이러한 생활 습관에 대해 그는 “옷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입는 것이 아니다. 내가 편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정말 맞는 말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나는 그동안 옷을 살 때 브랜드부터 따지고 들었으니 옷 자체의 소용(所用)보다 남의 눈을 의식한 허영심이 밑바탕에 깔린 까닭이리라.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수많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느끼며 안으로 농축시킨 후에야 마침내 허영의 옷을 훌훌 벗어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유년시절의 가난을 보상받기 위해 성공한 이후 물질로 삶을 채우기보다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검소와 겸허함을 체득하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으니 그가 범인(凡人)은 아닌 게 확실하다.
영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실패한 영웅으로 그려졌지만 현실에서 그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났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마구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구를 구하고 악당들을 물리치는 허상의 영웅이 아닌 60세 생일날 아내와 단둘이서 단출하게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지하철에서 팬들과 얘기하며 셀카를 찍는 인간미가 넘치는 영웅.
단 하나 아쉬운 건 그가 한국 사람이 아니란 점이다. 우리에겐 왜 이런 영웅이 없을까? 요즘 많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방송 등 언론매체에 나와 기부를 한다, 봉사를 한다며 부산하지만 대중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소위 ‘통 큰 기부’를 하는 재벌들도 높은 담과 명품 갑옷으로 자신들을 감추고 있다.
우리에게도 어찌 주윤발과 같은 인간미 넘치는 영웅이 없겠는가. 그들을 태운 지하철이 아직 우리 곁에 도착하지 않았을 따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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