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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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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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소장

[경북도민일보] 어릴 때 전자제품 외판원을 보노라면 카셋트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목을 가로 질러 두 개를 메고 양 손에 하나씩 들고 가는데 가끔은 어깨에까지 걸다 보니 5개씩 몸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은 카셋트처럼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다닐까?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 들면서 이유를 알 게 되었습니다. 카셋트를 많이 팔아서 아내에게 ‘여기 쌀 값 있소’라고 자랑스럽게 돈을 건네주거나 예쁜 딸에게 운동화 한 켤레 사 주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의 삶만 책임진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삶의 짐과 기쁨이 교차하면서 마치 음과 양이 세상을 운행하듯 그렇게 삶은 움직입니다.
생 택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안응렬 옮김)는 항공기 조종사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이 되면서 동시에 끊임 없이 고난을 던지는 대지(大地)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1920~30년대에 비행은 위험이 많이 따랐습니다. 죽기도 하고 조난도 많이 당합니다. 생 텍쥐베리 자신이 리비아 사막에 조난당하고 비행기 추락으로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결국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되죠. ‘인간의 대지’에서는 동료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에서 조난 당했다 살아 돌아 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데스 산맥 6900미터에서 기요메는 조난을 당합니다. 안데스 산맥의 5000미터를 넘는 곳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습니다. 그는 눈 속에 대피소를 파고 48시간을 기다리다 폭풍설이 멎자 영하 4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닷새 낮과 나흘 밤을 걷게 됩니다. 너무나 힘들어 생명의 짐조차도 없어지고 고통을 벗어나려 대지에 엎드려 버립니다. 그 때 기요메는 번뜩 아내를 생각합니다. 보험 증서가 있으니 비참한 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실종이 되면 법정 사망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4년을 기다려야 보험금을 받는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번갯불처럼 떠오른 것입니다. 기요메는 50미터 앞의 바위를 보았습니다. 잘 보이는 바위에서라도 죽으면 여름날 시체가 발견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는데 그대로 이틀 밤과 사흘 낮을 걸어 구조됩니다.
생 택쥐페리는 동료 기요메의 위대함은 책임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기에 대한 책임, 우편물에 대한 책임, 희망을 품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 계속 걷고 있을 것이라는 아내의 희망에 대한 책임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죽음이라도 책임을 알고 있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대지’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삶의 의미들을 보여줍니다.
죽음이 곁에 서성거려도 평상심으로 비행기에 올라 타는 동료 조종사들. 곧 있을 돌격 명령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아는 데도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우자 ‘시간이 됐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묻는 스페인의 어느 중사.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다가 공화파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온 것은 마음 속에 응당히 피어난 정의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마드리드 전선에서는 한 병사가 참호에서 떨어진 곳에 수염 난 농부들을 앉혀 놓고 식물학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앞 두고 마음이 평화로운 이유를 아무리 하찮을 것일 지라도 그들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할’을 의식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노후 삶의 의미는 어떨까요? 책임과 역할은 나이 들수록 하나 둘씩 덜어집니다. 자녀에 대한 책임, 직장에서의 책임, 부모님에 대한 책임들이 가벼워집니다. 어느 날 역할이 모두 없어진 걸 발견하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자녀에 대한 책임이 강하다 보니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 독립할 때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다고 합니다. 노후에 이제 모든 게 홀가분해졌다고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뻥 뚫린 구멍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책임과 함께 삶의 의미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동력도 떨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거창한 역할이 아닌 작은 것에서라도 나의 역할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물고기 구피를 들여와서 키우고 있습니다. 틈틈이 물도 갈아주고 수초도 넣어 줘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고 제가 키우던 생명이 죽은 것을 치우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저는 물고기가 잘 놀고 있는지 혹은 바닥에 붙어 있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곰곰이 봅니다. 이러다 보면 참 나(眞我)에서 사단(四端) 중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發)하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가족과 직장에 집중되었던 책임과 역할을 사회로 돌리면 좋습니다. 사회에 나가 보면 누구의 역할 속에도 포함되지 않는 분야들을 봅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적 성격 때문에 재화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거나 소외된 분야입니다. 우리나라 고령자는 TV를 많이 보는 반면 사회참여 비율이 낮습니다.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가져 보는 것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필생의 과업을 하나 해 보는 것입니다. 1745년 에도 시대에 태어난 이노는 기념비적 지도 제작으로 일본에서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장사로 돈을 많이 모았지만 50세에 아들에게 물려 주고 천문학을 배웁니다. 지구의 정확한 크기를 알려면 거리 측정을 잘 해야 했고 이로 인해 팔자에 없는 지도 제작을 하게 됩니다. 이노는 17년 동안 일본 열도를 걸어서 실측하고 71세에 돌아와 73세에 사망을 합니다. 지구 둘레의 85%나 되는 일본 해안선을 걸었고, 이를 통해 1/36,000 축척 대지도가 214매에 이르는 엄청난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잡다한 역할과 책임을 벗어버리면서 하나에 몰두 할 수 있는 노년의 장점을 활용해보면 어떨까요?
삶의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가당찮은 과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대지’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삶의 동력은 삶의 의미에 있으며 삶의 의미는 책임감이며 역할입니다. 젊을 때는 책임과 역할이 주어지지만 노후에는 주체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노후에 책임과 역할의 재설정을 통해 삶의 동력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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