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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新星), 별의 도시 영천에 잠들다
모용복기자  |  mozam0923@h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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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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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흑백 브라운관에 처음 비친 신성일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늘씬한 키, 오뚝한 콧날, 단정한 입매, 짙은 눈썹, 그리고 우수(憂愁)에 차 있으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눈…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 보는 걸 참 좋아했다. 집이 시골이기도 하고 나이가 어려 극장에 갈 수 없었던 탓에 나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빠지지 않고 챙겨 보곤 했다. 당시에는 방송에서 연령 제한이 없던 시절이라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드라마와 영화를 함께 시청했다. 아이들이 보기에 좀 민망한 러브신 장면이 나올 때면 심장이 방망이질하고 오금이 저려왔다.

60~70년대 영화배우 중 스타는 단연 신성일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不許)하는 빼어난 외모와 호소력 짙은 매력적인 목소리(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 목소리 주인공은 후시녹음을 한 성우임)를 지닌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독차지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 데뷔한 그는 내가 영화 보는 재미에 눈을 뜰 때쯤엔 이미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수많은 청춘스타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했고, 충무로에 흔적을 남긴 일부 스타들도 그가 남긴 족적(足跡)을 감히 범접할 수는 없었다.
비록 전성기가 지났지만 학창시절 우리는 여전히 신성일과 엄앵란의 얘기를 했으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주워 담으려 애썼다. 여자애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신성일과 다른 청춘스타의 외모를 놓고 다툼 아닌 다툼을 벌였다. 텔레비전이 거의 유일한 영화감상 창구였던 시절 신성일이 나오는 영화가 방영되는 날이면 온 가족 모두 만사를 제쳐놓고 브라운관 앞에 모여 그의 잘생기고 멋진 외모에 빠져들었다. 그는 단연 별 중의 별이었다.
엊그제 그 별이 마침내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국영화의 신화적 존재인 신성일 씨가 지난 4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년 여 간 폐암과 사투를 벌여오다 며칠 전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마침내 피안(彼岸)으로 떠난 것이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에서 호떡장사를 하는 등 고학(苦學)생활을 하다 신상옥 감독을 만나 배우로서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신성일이란 이름도 이 때 신 감독이 ‘뉴스타 넘버 원’이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예명이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신성일은 이후 ‘아낌없이 주련다’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내면서 명실공히 한국영화계의 국민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주연을 한 영화만 무려 500편이 넘는다. 한 때 정치계로 눈을 돌려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았다. 5년 전에는 70대의 백발 노장이 되어서도 ‘야관문: 욕망의 꽃’이란 영화에서 손녀 뻘인 여배우 배슬기와 함께 출연해 열연을 펼치는 등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비단 그가 출연한 영화 편수와 열정에만 있지 않다. 영화인 신성일 이전에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남자였기에 그를 존경하고 추모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재산을 탕진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남들은 조금만 뜨면 부동산이다 뭐다 하며 자산 축적에 바쁠 때 5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은 대배우가 남은 재산이 거의 없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물욕(物慾)에 초연(超然)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사나이’였지 졸부(猝富)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단순히 잘난 외모만 가진 스타가 아니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기에 서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으며 그것은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60~70년대 ‘맨발의 청춘’ ‘장군의 수염’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등 작품에서 소외된 청춘들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30~40대 남성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려 동시대를 살아가는 뭇 남성들에게 위로를 전했으며 그들로부터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영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투병 중에서도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내년 봄,  직접 기획을 하고 주연을 맡는 ‘소확행’ 영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메가폰은 ‘별들의 고향’ 등 작품을 함께 한 이장호 감독에게 맡겼다.
영원한 스타로서 영화처럼 삶을 살다간 고(故) 신성일 씨. 일세를 풍미했던 대스타의 죽음 앞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한국영화사(史)에서 큰 별이 진 아쉬움이 교차된다. 그의 시대는 이제 저물었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사라지지 않는 별로 남아 찬란히 빛날 것이라 믿어 마지않는다.
오늘은 그가 ‘별의 도시’ 영천에서 ‘별들의 고향’으로 영원히 귀향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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