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되는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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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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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브루니의 ‘French touch’ 를 들으며
▲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French touch
주말의 아침이면 그 주의 LP를 고르는 데에 공을 들인다. 그것은 한 주 중 가장 느리고 즐거운 나만의 시간이다. 음악은 때때로 손끝에서 시작하는데 디지털 음원으로는 그 재미를 맛보기 힘들다. 내 손은 고전 클래식을 거쳐 몇몇 스탠다드 재즈 앨범들을 스친다. 잊고 있던 뮤지션을 만날 때도 있고 겨울의 앨범들에서 서성일 때도 있다. 오늘 아침의 나는 팻 메스니와 제임스 테일러와 휘트니 휴스턴을 거쳐 카를라 브루니에 닿는다. 앨범을 넘기는 짧은 시간 동안 이들의 대표곡이 머릿속에서 짧고도 강렬하게 재생된다. 나는 가을의 아침을 풍요롭게 만들 요량으로 그녀의 LP를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린다. 고전 팝을 리메이크 한 ‘French Touch’라는 제목의 앨범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였던가. 거침없이 자신의 숨을 몰아쉬는 이 여인의 음색에 매혹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카를라 브루니를 알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의 소개였는지, 무슨 영화에 삽입되었는지 그다지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녀가 누구이며 누구의 부인인지 이슈와 행보는 또 어떤지 중요하지 않다. 카를라 브루니의 음악을 턴테이블에 올려두고 있으면 그녀와 나 이렇게 둘만 거실에 남게 된다. 태생적인 목소리인지 만들어진 목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감출 수 없는 에로틱함이 스미어 있다. 팔과 다리가 긴 이 여인의 중후한 목소리는 단출한 악기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무게를 가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치명적인 유혹을 선보인다. 긴 손가락으로 기타를 퉁기며 보드랍게 마이크를 감싸 쥐며 그녀는 숨을 쉰다. 숨을 받아들이고 있자니 약간은 취해도 좋을 것 같다. 그 술이 프랑스산 와인이라면 더 어울릴 것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일요일 아침이라 해도.
-숨과 쉼

노래를 잘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당시의 나는 비극적이게도 노래 실력을 옥타브의 높낮이로 규정하던 나이였다. 허구한 날 해보지도 않은 이별을 노래했고, 대상없는 구애를 울부짖었다. 슬픈 노래는 슬프게 불러야 한다는 1차원적 의식으로 목에 갈기갈기 상처를 내고 있었다. 변성기가 지나갈 무렵에는 목젖이 굵어지고 수염이 솟아버려 돌이킬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높은 음역을 넘나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다. 나는 가수가 될 수 없을 거야. 내가 기타를 치게 된 건 오해로 비롯한 호기로운 대안이었다.
나는 이제 소년이 아니고, 음역대로 노래 실력이 판가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노래가 경쟁이 아니라는 것도 알기에 실력이라는 단어는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음악은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의 한 방식일 뿐,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쉬는, 들이마시는 숨소리를 붙잡아 멜로디에 얹기만 하면 되는 것을. 흥얼거리기만 하면 좋은 것을. 잘 부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을. 노래는 결국 숨이 아닌가. 아니라면 그것은 쉼인지도 모르지. 숨과 숨 사이의 정적, 흐르지 않는 공기, 침묵의 파편, 거룩한 적막. 쉼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들이마셔야 내쉬어야 사니까, 노래는 삶일까. 흐느낌도 울음도 숨이 깊은 후에야 뱉어지는 것인지 서정에 유독 쉼이 많다. 숨과 쉼과 숨 쉼과 쉬는 숨 속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시와 다르지 않다. 이국의 언어라 해도 그것은 나와 연결된 심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숨을 공유하는 우리는 그러한 공동적인 감각을 향유할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향유. 그래, 이 단어가 카를라 브루니의 저음과 꼭 붙은 단어로 보인다.
-카를라 브루니
예전에는 더 넓은 세상 더 먼 장소를 찾는 걸 여행이라 여겼다. 새로운 것을 보고 맛보고 즐기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니 이곳이나 저곳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딘가로 나가지 않아도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간이야 말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를라 브루니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나와의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밖은 가을이다.
퐁 뇌프에서 물랑루즈에서 센 강가와 광장에서 노래하던 예술가들은 이 계절을 한층 짙게 만들었다. 에디트 피아프도 이브 몽탕도 조르주 무스타키와 레오 페레도 모두 가을을 닮았다. 사람들은 다 이상해요. 그리고 영혼은 혼란스럽고요. 카를라 브루니가 말한다. 누군가 내게 말하길, 인생은 뭐 그리 대단한건 아니라고, 빠르게 시들어 가는 장미처럼요. 카를라 브루니가 노래한다. 네가 음계라면 나는 음정이고, 네가 무기력이라면 나는 낮잠이야, 넌 내림표고 난 올림표지, 넌 피라면 난 혈관이고, 네가 레몬이면 난 껍질일거야. 어루만지는 듯 노래하는 브루니의 섬세한 목소리도 이 계절 위에 올려두고 싶다. 창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이 낮고 짙은 목소리를 밖으로 흘려보낸다. 색 바랜 것들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다. 이제 잠시 산책을 나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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