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돌바람
  • 모용복기자
손돌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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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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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애절한 유행가 가사가 아니라도 첫눈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한가지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연인 사이에 첫눈 올 때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거나 첫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또 안타까운 이별 후에 쓸쓸이 발길을 돌리던 날도 어쩌면 첫눈이 내리는 날일 수 있겠다. 그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모레(22일)다.
소설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기온이 갑자기 급강하한다. 예전 농촌에서는 농사철이 끝난 뒤 농민들이 허리를 잠시 폈다가 이 때가 되면 월동준비로 다시 일손이 분주해진다. 시래기를 엮어 처마 밑에 매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며 겨우내 소에게 먹일 볏짚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올려 단단히 묶어둔다. 또 한파가 닥치기 전에 김장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대개 소설 즈음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며 날씨가 매서워진다. 소설에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 하는데, 이날 뱃사람들은 배를 띄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풀이 무성한 여울로 배를 몰았다. 피난길에 마음이 급해진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命)하였다.
손돌은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자신이 죽은 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가 가는 길을 따라 배를 저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이 죽은 후 물살이 거세져 위험에 처하자 왕과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바가지가 가는 방향으로 배를 저어 무사히 강화도로 피할 수 있었다. 그제야 왕은 죽임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뱃길을 일러준 손돌의 충성심과 재주에 감복해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바로 소설이었다. 그 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가워졌는데,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이라 생각해 이 때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불렀다.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됐다고 한다.
요즘은 소설이 되기 한참 전부터 ‘손돌바람’ 못지않은 찬바람이 불어 닥치고 날씨가 사나워지니 그만큼 억울한 원혼들이 넘쳐나기 때문일까? 이를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흘려듣지 못할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 통탄(痛歎)할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 올해 3월 충남 논산에서 부부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생각할수록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지난해 4월 이 부부는 평소 남편과 알고 지내던 지역의 한 조직폭력배로부터 아내가 모텔에 감금된 채 갖은 폭행과 협박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이 조폭은 남편이 해외 출장을 떠난 사이 “가족을 해치겠다”며 아내를 협박, 충남 계룡의 한 모텔로 유인해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하지만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성폭행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자 부부는 지난 3월 한 캠핑장에서 ‘죽어서도 복수하겠다’는 절규를 토한 채(유서를 남김) 동반자살해 큰 충격을 안겼다.
이에 대해 지난달 31일 대법원은 부부의 한 맺힌 하소연에 귀를 기울였다.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인정될 여러 사정이 있는데도 증명력을 배척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의 판결에 잘못이 있다고 판단, 유죄 취지로 판결을 다시 하라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이미 피해자 부부는 생을 마감한 뒤이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부부의 호소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도 억울한 목숨이 희생되고 금수(禽獸)만도 못한 범죄자가 두 발 뻗고 자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억울한 생명을 희생시킨 사법살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피해자가 끝내 자기 목숨을 던져야만 피해자로 인정받고, 피해자는 희생되고 범죄자는 활보(闊步)하는 사회라면 법(法)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왕의 오해로 충직한 뱃사공인 손돌이 죽임을 당한거나 판사의 오판으로 피해자가 억울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 다를 게 무에 있나.
1000여 년 전에 불었던 손돌바람이 아직도 우리사회에 불어오고 있다. 현대판 손돌이, 논산 부부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짐작조차 안 간다.
첫눈은 서설(瑞雪)이라 했던가. 소설 첫눈이 손돌바람을 재우고 아픈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를. 사법부의 안이한 판단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강원도 어느 지역에는 벌써 한참 전에 첫눈이 내렸다는데, 우리 지역엔 이번 소설에 첫눈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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