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겨울의 피아노 솔로
  • 경북도민일보
짙은 겨울의 피아노 솔로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8.12.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들으며
▲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December
 12월이 되기를 기다렸다 조지 윈스턴을 꺼내어 듣는다. ‘December’라는 앨범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다. 해가 높거나 잎이 푸르거나 바람이 따스한 날에는 아무래도 이 앨범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어떤 음악에는 정확한 계절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앨범의 재킷에 설원이 펼쳐져 있다. 누구도 오가지 않는 눈밭에 나무 네 그루가 우뚝 솟아 있다. 사진은 희고, 푸르고, 희미하게 붉고, 또한 짙다. 수평선처럼 뻗은 설원과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는 묘한 비대칭으로 긴장을 자아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사각의 프레임 바깥을 꿈꾸고 있기에 보다 희망찬 느낌마저 감돈다. 폭신할 것 같은 눈과 고유의 색을 간직한 나무는 겨울은 결코 제자리에 멈춰있지 않다고 말한다. 다음에 올 계절을 강렬하게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사진 속 설원에는 발자국도, 흔적도, 기척이나 징조도 없다. 이 고요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누구도 섬처럼 외따로이 자라난 이 나무들을 방해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이 앨범을 통해 머나먼 이국의 겨울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 듣고 끌어안을 수 있게 된 셈이다.
 
 -Variations On The Kanon By Johann Pachelbel

 소년이 다루게 된 최초의 악기는 리코더였다. 길고 빼쪽한 이 악기는 열 손가락으로 붙잡기에 가볍고도 무거웠다. 입으로 내쉰 숨이 이렇게 다채로운 음계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소년은 음악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소년을 유혹하던 세이렌의 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부른 것이었다. 나르시시즘에 도취되어 칭찬을 갈구하던 그때 그 소년이 없었다면 나는 여태껏 글을 쓰거나 음악을 만들며 살아가는 삶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이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은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 ‘피구왕 통키 주제곡’, ‘아벨 탐험대 주제곡’, 그리고 ‘캐논 변주곡’이었다. 리코더를 불지 않을 때에는 계이름으로 이 곡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은 그 곡들과 가까워짐으로써 음악과 친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소년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건 음악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소년은 그 곡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되살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음악은 시간을 초월해 우리 앞에 도착한다. 17세기 독일 바로크 음악가 요한 파헬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은 <캐논과 지그 D장조>이다. 창작자는 죽어 사라져버리지만 그가 영혼을 담은 이 음악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몇 세기를 거쳐 많은 음악가에 의해 재창조되더니 한반도의 끝, 영도라는 섬에서 태어난 한 소년에게도 계이름을 호명당하는 것이다. 주제 음을 모방하며 되풀이하는 이 도돌이표 연주에는 재생(再生)의 꿈이 담겨 있다. 과거를 되살려 내며 화음을 긍정하는 이 연주에는 희망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어쩌면 그가 앨범의 제목을 ‘12월’이라 붙인 까닭은 순환의 끝에 선 겨울의 이미지만을 전달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곡의 러닝타임인 5분 21초가 지나면 하루가 끝이 나고, 우리 모두의 시계는 0으로 돌아간다.
 
 -정확하고 정중한 마음을 담아
 조지 윈스턴의 가쁘지 않은 호흡과 섬세한 연주가 우리를 심연의 끝으로 밀어 넣는다. 그의 연주가 있다면 이 겨울에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Thanksgiving’, ‘Joy’, ‘Peace’ 등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명곡들이 아직 계절을 감각하지 못한 이들의 LP보관함 속에 고스란히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 중 몇 명만이라도 이 앨범을 꺼내어 재생하길 부탁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네 마음 한 구석에 잠들어 있던 순수를 발견하는 일이며, 병마와 싸우는 조지 윈스턴을 82년도의 건재한 모습으로 되살려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신에게 바치는 고백과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과 관객을 향한 감사가 조지 윈스턴의 가늘고 긴 손끝에 담겨있다. 보다 정확하고 정중한 마음을 담아. 이 계절이 바뀐다면 나는 장롱 속에 겨울코트를 넣어놓듯이 이 앨범을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둘 것이다.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솔로 앨범 ‘December‘는 단지 겨울에만 유효한 것이나, 겨울은 제자리를 향해 돌아올 것이니. 기꺼이 12월을 맞이할 이보다 좋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