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
  • 경북도민일보
‘직면’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8.1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북도민일보] 금요일 저녁이면 가슴이 설렌다. 주말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간다. 길도 없고 인적도 없는 깊은 산속을 약초를 찾아 홀로 무작정 헤맨다. 처음에는 푼더분하고 평화로운 그 품이 좋아 산을 찾았지만 오랫동안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약초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지도를 보며 미리 검색해 둔 곳으로 안개를 헤치며 달려가면 마치 내 자신이 TV에 나오는 코리아헌터가 된 듯 우쭐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가방을 메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늘은 왠지 대물 한 뿌리 볼 것 같다는 좋은 예감도 들었다. 산을 오르내리기를 한나절. “휴우! 나는 아무래도 약초꾼 소질은 없나보다. 산 하나를 이리 샅샅이 뒤졌는데도 도라지 한 뿌리 보지 못했으니… 쯧쯧” 혼자 혀를 차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절벽언저리 앉아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냉수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백수오가 바로 발치아래 있는 것이 아닌가? 굵은 줄기와 무성한 넝쿨을 이룬 것으로 보아 대물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백수오가 절벽에 붙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안전장비나 밧줄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백수오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곡괭이로 찍어 발을 디딜 곳을 만들고는 바위모서리를 움켜잡고 다른 한손으로 조심스레 괭이질을 시작했다. 과연 대물이었다. 굵은 뇌두가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더 파고 들어가자 뿌리가 돌 틈새로 들어갔다. 돌을 빼내려고 했지만 한손으로 작업해야 되는지라 쉽지 않았다. 곡괭이로 돌을 걸어 옆으로 힘껏 젖히려는 순간 곡괭이가 빠져 튕기면서 그만 중심을 잃고 절벽으로 굴러 떨러지고 말았다. 경사가 80도는 족히 되는 절벽이었다. 구르며 떨어지다 바위틈에 나 있는 잡초와 작은 나무를 움켜잡았지만 뿌리째 뽑혀 다시 미끄러졌다.
갑자기 등짝에 큰 충격이 느껴졌다. 절벽중간에 듬성듬성 서 있던 나무에 몸이 걸린 것이었다. 더구나 펼쳐진 가지에 내 몸이 안기듯 걸려 있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거기서부터는 수직절벽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휴대폰은 배낭에 들어 있어 구조요청을 할 수도 없고 이 깊은 산중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데..”

다른 도리가 없었다. 떨어졌던 절벽을 천천히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암벽등반을 취미삼아 몇 개월 해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올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절벽을 기어오르던 중에 보게 되었는데 그 척박하고 비탈진 곳 바위틈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고 작은 나무마다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맺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틀쯤을 멍하니 보냈다. 나는 적어도 앞으로 몇 십 년은 더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가슴을 치며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얼마나 많은 숱한 시간들을 불평속에 소모시켜 버렸던가! 소중한  날들을 권태속에 얼마나 질펀하게 마구 흘려보냈던가!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책상에 앉아 멱목 같은 새 하얀 백지 한 장을 펼쳤다. 그리고 한줌의 눈물을 뿌리며 천천히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남은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 하며, 가장 소중한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 당장 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를…“
나는 시한부 인생이란 것이 말기 암환자에게나 적용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 앞에 서게 되므로 사람은 모두 시한부 인생인 것이었다. 그리고 죽음과 대면하면 삶의 숱한 무거리가 남는다는 것과, 생의 마지막 때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지인들이 갑자기 사람이 왜 그리 변했느냐고 자주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삶이나 이별이나 그 무엇이든 마지막 순간에 직면해봐라! 못다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후회가 둑 터진 물살같이 밀려든다고.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오고야 말 마지막 그 순간에 회한의 시뻘건 황톳물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고 절벽에 매달린 마음으로 산다. 그리고 척박한 절벽에서도 꽃피우고 열매맺는 나무처럼 내게 주어진 소명 다하고자 열심히 살려한다 ” 라고 말한다.
붙박인 내 자리에 투덜거리며 평생 다짐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던 것을 그 한 순간이 다 이루게 하였다. 이후로 나는 아침마다 창으로 드는 한줄기 햇살에도, 귓전을 스쳐 가는 바람에도 그리고 일상의 매 순간마다 감사하게 되었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