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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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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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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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민일보 = 뉴스1]  어머니는 제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를 가끔 하십니다. 그 옛날에 국수 공장을 했는데 제가 태어난 해에 흉년이 들어 국수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밀가루는 원조물자라 국내 작황과 관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배속에 있는 그날부터 열심히 일하시느라 12월에 태어났을 때는 작은 데다가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제일 위 형님이 있고 그 다음에 연속 두 명이 딸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민망할 때는 아들이라는 것 하나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1962년에 어떤 흉년이 들었는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궁금합니다. 당시 8살 위인 형님이 너무 좋아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놀 동생이 없어 심심했는데 남자 동생이 나서 그랬답니다. 그래서, 결론은 당신이 없더라도 형님과 우애 있게 잘 지내라는 이야기이십니다. 이상이 저의 탄생실화입니다.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4000년 전에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가 있었고, 성경에는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800년 전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있습니다. 모두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이야기 전개는 우리를 흠뻑 빠져 들게 합니다. ‘길가메쉬’의 고대 바빌로니아 판본을 보면 처음이 “길가메쉬가 일어나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로 시작하고 성경의 천지창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일리아드’ 역시 트로이 전쟁의 기원에 관해 설명을 장황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싸움 장면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먼 옛날 선조들은 이야기꾼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자서전 쓰기 교실들이 많이 개설되고 있습니다. 자서전은 자신이 살아 온 시대의 역사와 연표를 공부하고 여기에 삶을 대입하여 이야기를 꾸려 갑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정확하게 기술하기 때문에,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고 세밀한 개인사는 역사에서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30년 전에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받은 일당 금액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자료가 됩니다.
 하지만, 자서전보다 더 원초적인 ‘이야기’를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야기와 자서전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자서전이 주관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데 반해 이야기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관점이 개입됩니다. 자서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가족 관계는 어떠했다는 것에서 주로 출발하지만 이야기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첫 문장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이야기 전개를 입체적으로 해 나갑니다. 연도순으로 기술하지 않기에 머리를 훨씬 많이 굴려야 합니다.

 둘째, 이야기는 자서전과 달리 극적인 요소나 ‘구라’가 들어갑니다. 이는 이야기를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2003년에 개봉한 ‘빅 피쉬(Big Fish)’라는 영화에서 아버지(이완 맥그리거 분)는 자신의 삶을 동화처럼 아들에게 들려 줍니다.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수선화를 집 앞에 깔기 위해 5개 주(州)의 꽃집에 모두 전화를 해서 구했다는 이야기들, 어마어마한 거인과 친구가 된 이야기 등 모두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삶에 허풍을 떨지 말고 단 한 번이라도 자신에게 진실하면 좋겠다며 불만을 갖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장례식 날 찾아 온 조문객들은 서커스 단장, 거인을 비롯해 아버지가 동화처럼 말한 이야기에 등장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말한 엄청난 거인은 아니었지만.
 셋째, 자서전은 더 이상 확장이 어렵지만 이야기는 유연성과 확장성이 있습니다. 주된 줄거리만 유지되면서 변형이 가능합니다. 이야기가 몇 단계 거치다 보면 진화하여 훨씬 풍부해지기도 합니다. 버전(version)이 계속 바뀌는 셈이죠. 삼국지(三國志) 역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적 요소가 오랜 세월 섞여서 나온 결과입니다. 이런 요소가 없었다면 위,촉,오 삼국의 역사와 등장인물에 그 많은 사람이 관심을 쏟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자서전과 달리 글로 쓸 필요는 없습니다. 큰 마음 먹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식과 손자에게 단편적이나마 하나씩 들려줘도 됩니다. 장인어른은 저희들이 찾아가면 심심하신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지금도 인터넷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시는데 중학교 때는 장기 야바위꾼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가만히 그 원리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는 연전연승이었고 결국 야바위꾼에게서 다시 오면 가만 안 둔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런 걸 보면 남자도 가끔 수다스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은 ‘경(經)’을 익히는 데 반해 서양은 스토리가 발달한 듯합니다. 동양에 공자, 맹자가 있다면 서양에는 ‘일리아드 오디세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티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습니다. 이제는 점잖은 가훈 이외에 집안의 이야기인 가화(家話)도 하나 있으면 어떨까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쓰는 것은 여러분 삶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명절에 친지들이 모이면 답 없는 정치 이야기로 얼굴 붉힐 필요 없습니다. 부모님의 인생을 이야기해달라고 해보세요. 아니면 형이나 누나가 나를 어떻게 데리고 놀았는지 물어보세요. 자녀와 식사를 할 때는 아빠, 엄마의 결혼 이야기나 애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때의 일들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상대방의 이야기가 내 머리에 각인되고 나의 이야기가 상대방 머리에 각인되는 것도 일종의 경험의 공유입니다. 신화가 민족을 묶듯이 이야기는 가족을 묶어 줍니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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