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사이사이 존재하는 깊은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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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사이사이 존재하는 깊은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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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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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경북도민일보] 웸의 ‘The Final’을 들으며

 -행복을 만나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서너 개의 중고 LP상점이 모여 있다. 요즘은 대부분 디지털로 음악을 듣는 시대이기에 LP 상점에는 늘 손님이 뜸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의 공기와 냄새와 습도가 마음에 들어 자주 들락거렸다. LP상점은 나를 옛날로 데려갔다. 무엇보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명반들이 켜켜이 쌓인 먼지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또한 LP 한 장은 커피 한 잔보다 싸기에 부담도 덜했다. 그날 역시 주머니에 천 원 지폐를 몇 장 찔러 넣고 LP쇼핑을 나선 참이었다. 그런데 ‘소릿골’이라는 상점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회색 헌팅캡을 쓴 그는 LP 한 장을 눈 가까이 당긴 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주 가던 LP카페 ‘라디오’의 주인이자, 대구 bbc FM으로 시작해 부산KBS방송총국에서 ‘도병찬의 뮤직파일’로 청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전설의 DJ 도병찬 선생님이었다. 라디오가 작년 여름에 문을 닫았기에 선생을 만난 것은 실로 반 년 만이었다. 이런저런 소식을 전한 것도 잠시, 우리는 어느새 턴테이블과 LP로 화wp를 돌렸다. 내가 아는 올드 팝은 대부분 그에게 배운 것이고 그의 음악적 태도는 누구보다 젊고 단단하다는 사실이 나를 늘 겸허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한 마음으로 추천곡을 여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어쩌면 구입하려고 결심한 것인지도 모르는 앨범을 한 장 내밀었다. 나는 상태를 보지도 않고 곧장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서점에서 사온 책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갈 때,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극장의 어둠이 나를 감싸 안을 때, 이처럼 귀한 LP를 들고 스피커를 마주할 때가 나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나는 바늘을 조심스럽게 들어 소릿골에 올려두었다.
 
 -마술적 음악
 오후의 가벼운 공허를 짓누르는 상쾌한, 아니 쾌활한 음악이다. 검은 판에서 이토록 놀랍게 튀어 오르는 멜로디의 향연이라니. 검고 윤기 나는 바이닐(vinyl)일 뿐인데 그 안에 숨겨진 음표들은 정확하고 조화롭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음악은 어쩌면 오선 줄에 별처럼 박혀 있는 음표들이 제 몸을 태우며 다음 음표에게 전달하는 충격은 아닐는지. 그러한 에너지의 작용이 아니고서야 우리의 귓가를 두드리는 이 감동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음악은 시간을 가장 극적으로 쏟아 붓는 예술이라 해도 좋겠다. 어쩌면 모든 뮤지션의 본질은 매지션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내가 당신에게 건네는 이 마음도, 말도, 멈칫하는 주저함 모두 그 음악적 성질-시간에 순응하는 혹은 저항하는-에 기인한 마술이 아닐까.

 이 앨범, ‘The Final’을 마지막으로 웸은 해체의 수순을 밟는다. 하지만 웸을 존재하게 한 조지 마이클의 행보는 그때부터 진가를 발휘한다. 조지 마이클이 전설로 남게 된 것은 천부적인 작곡 실력과 빼어난 보컬리스트라는 요인이 크겠지만, 온 마음을 다해, 사력을 다해, 전투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스스로 믿고 나아갔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죽음이 그의 연인을 빼앗아 갔으며, 갖은 사건들은 그를 밀어냈다. 마지막 솔로 앨범을 내고 난 이후로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외떨어진 채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되짚어보면 그가 얼마나 뜨겁고 열정적이며 진중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퀸의 프레디 머큐리 추모공연에서 보여준 표정과 몸짓과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신의 고통과 회한, 그리고 추모의 형식으로서의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그 역시 성소수자였으며, 연인을 잃은 고통으로 힘겨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부끄럽지 않은 음악적 세계를 펼쳐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마음을 다 했다. 그 사실이 여태껏 그의 음악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릿골
 노란색 코드 악보를 보며 볼품없는 영어 발음으로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불렀던 때가 벌써 20년 전이다. 이미 웸이 해체한 이후였고, wham!을 어떻게 소리 내어 불러야 할지도 몰랐던 때였다. 이 발랄한 듀엣의 대표곡인 ‘Last Christmas’가 흘러나오자 그 시절로 이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웸은 언제나 마지막 크리스마스라 노래했지만 매해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들의 음악은 되살아났다. 그런 조지 마이클이 2016년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에게는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도, 자유(freedom)도, 나쁜 소년(bad boys)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웸을 내게 추천해준 도병찬 선생님은 여러 문화공간들에서 추억의 뮤직파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어느 때고 찾아가 그를 만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한적한 오후, 그와 내가 중고 LP 상점에서 만났다는 것이 다소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선생님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LP의 골과도 같은 그 나이테 속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었다. 이 중고 LP상점의 상호인 소릿골과도 같은, 음악의 사이사이 존재하는 깊은 골이. 나는 그런 분들에게 좋은 문화를 물려받은 또 하나의 주름이 될 것이고.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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