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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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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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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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민일보 = 뉴스1]  ‘대부’는 죽음의 비극이 깔려 있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대부(代父)인 돈 꼴리오네(말론 브란드 분)는 상대 패밀리의 총격으로 큰 아들 소니를 잃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노년에 어린 손자와 정원에서 놀다 쓰러져 죽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흔들다 가족을 부르러 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납니다. 대부의 자리를 이어 받은 마이클(알 파치노 분)은 패밀리를 위해 둘째 형을 죽입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가장 소중한 딸을 총격의 와중에 잃게 됩니다. 마이클이 딸을 안고 절규하는 장면은 아버지 돈 꼴리오네가 장남을 잃고 꾹 참으며 오열하는 장면과 오버랩 됩니다. 영화는 마이클이 죽는 장면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노년에 정원 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 옆으로 고꾸라지면서 ‘대부 3’은 끝납니다.
 ‘대부’는 많은 죽음의 형태들을 보여 줍니다. 죽음의 형태는 삶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하며 우리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어릴 때는 누구나 좋은 삶을 꿈꾸지만 정작 엄청나게 다른 길을 걷게 되죠.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년에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이별을 하거나, 혹은 조용히 소파에 앉아서 죽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사고로 죽거나, 병에 걸려 일찍 죽기도 하고, 오랜 동안 앓다가 지치고 지쳐버린 상태로 죽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의 형태는 모두 다양하지만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릅니다.
 제가 죽음을 깊이 보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기말고사를 먼저 끝내고 옆 하숙방에 있던 친구는 먼저 고향에 내려갔고, 저는 뒤에 같이 텐트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밤에 자다가 가위 비슷한 걸 눌렸습니다. 검고 큰 물체가 저를 뒤에서 꽉 안았는데 제가 답답해서 계속 뿌리치자 그 물체는 떨어져 나와 제게서 아득히 멀어지는 꿈이었습니다. 자다가 깬 적이 없을 정도로 깊이 자는데 그렇게 일어나니 기분이 찜찜해서 시계를 보았습니다. 12시 40분. ‘이런 게 가위 눌린다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잤는데 새벽 3시 반쯤에 하숙집 할머니가 제 방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경찰서에서 전화 왔으니 빨리 받아 보라 하셨습니다. 전화기의 경찰관의 말은 친구가 다리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 먼저 끝났다고 저를 놀리면서 고향 내려간 게 엊그제였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경찰서에 가서 사망 시간을 물으니 새벽 12시 30분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제 꿈 깬 시간이 10분 후였습니다.
 이후 수년간 저는 자다가 가위 눌려서 깨보면 시계 바늘이 1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는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그 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후세계든 뭐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것만은 틀림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죽음을 정체성의 완전한 소멸로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쓴 예일대 교수 셸리 케이건은 영혼은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죽음은 육체적 소멸로 자기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살아 있지만,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나’라는 정체성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생 자체가 불행일 수 있기에 그 소멸이 불행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불교에 의지한 신라인과 유교가 중심이 된 조선인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다릅니다. 향가 ‘제망매가’에서 월명사는 죽은 누이가 극락에 가기를 염원합니다. 조선에서는 사당에 조상을 모시고 인사하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같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형태뿐 아니라 관점도 다양합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합니다. 2009년에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생명 연장장치를 거부하고 두 각막을 기증했으며, 더 기증할 게 없느냐고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런 모습을 보인 이면에는 오랜 동안 기독교인으로서의 수양을 통해 죽음에 대한 관점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낡은 육신을 갈아 입는 것으로 보는 불교의 고승들은 ‘나는 오늘 간다’라고 말하고 앉아서 열반에 들기도 합니다.
 요즘 죽음에 대한 대비(對備)로 웰다잉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일명 웰다잉법)이 시행되었습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확대되어 죽음에 구차하게 집착하지 않고 품위 있게 죽어야 한다는 것으로 웰다잉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영화 ‘엔딩 노트’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의 태도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고 죽음의 태도에 대한 판단까지 이어집니다. 끝까지 살아보겠다고 의사에게 매달리면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다가 황망간에 죽은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고,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가족과 웃으면서 이별 여행 하는 것을 웰다잉의 사례인 것처럼 소개하는 글들을 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 논의가 ‘죽음에 대한 올바른 태도’ 논의로 이어진 셈입니다.
 죽음의 태도는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죠. 웰다잉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잉’에 대한 관점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잉’을 직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죽음을 낯선 것으로 하여 생각에서 격리시키거나 미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격리시키고 유예시킨 죽음을 지금 여기로 데려와야 합니다. 김형석 선생께서는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 깊이 빠져도, 그렇다고 너무 가벼이 생각해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웰다잉은 ‘다잉’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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