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빈집’ 中)
모든 노래에는 사랑이 있다. 노래 속, 저마다 가진 추억의 깊이와 스토리는 다르지만, 먼훗날 그 노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곤 한다.
죽음을 1분 앞둔, 한 남자가 기억의 빈집을 여행한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80·90년대를 상징하는 故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가 흐른다. 추억과 사랑, 청춘의 순수를 떠올리게 하는 이영훈의 노래를 따라, 기억의 빈집 여정에 나선다.
故 이영훈 작곡가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예술을 주제로 한 곡들로만 이뤄진 뮤지컬 ‘광화문연가’가 지난 2, 3일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포항문화재단이 포항시 시 승격 70주년을 기념해 마련했다. 총 4회 진행된 이번 공연에는 2500여명의 관객들이 찾아 지난한 청춘의 흔적을 더듬고 순수했던 사랑의 그 때를 회상했다.
2회차 공연이 진행된 2일 오후 7시30분 공연을 직접 찾았다.
삶과 죽음, 그 경계 선 중년의 ‘명우’가 순수의 세계에 도착했다. 죽기 전 1분 중년의 명우는 인연을 관장하는 추억여행 가이드 ‘월하’를 만나, 자신의 첫사랑 ‘수아’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를 맡은 김호영은 특유의 위트와 재치, 능청스러움으로 극의 서사를 이끌었다. 월하를 통해 기억 속 빈집을 찾아나서는 중년의 명우에는 이건명이 나서, 중년의 쓸쓸함을 전했다.
2막으로 구성된 ‘광화문연가’는 시인 기형도의 대표작 ‘빈집’을 차용, 변주하며 극 전반의 스토리를 이끈다. 이영훈의 명곡, 기형도의 시, 월하와 함께하는 명우의 시간여행이 맞물리며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세계가 완성된다. 그렇게 죽음의 순간,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월하의 안내를 따라, 1984년 덕수궁의 어느 봄날로 돌아갔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옛사랑’ 中)
젊은 명우는 덕수궁에서 열린 사생대회에서 첫사랑 수아를 만난다. 수아와 명우는 그렇게 순수하게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5년, 대학생이 된 수아와 고3 대입을 준비하는 명우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음을 마주한다.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던 친구가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수아는 더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명우는 그런 수아에게 ‘어른들이 할 일이 있다’며 그녀를 말린다. 그러던 중 명우는 입대하고, 수아는 운동권에 투신한다.
시위 중 운동권 후배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도한 수아는 지금은 사랑에 아파할 시간이 아님을 느끼고 명우에게 이별을 고한다.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수아와 그런 수아를 이해하지 못한 명우는 ‘빗속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을 통해 슬픔으로 발화한다. 젊은 명우를 맡은 이찬동은 사랑이 전부였던 그 시절 명우의 순수를 자신만의 색채로 오롯이 풀어냈고, 젊은 수아를 맡은 이봄소리는 시대에 항거했고, 그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던 그 시대 청춘의 아픔을 노래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 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 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광화문 연가’ 中)
명우는 작곡가가 됐고, 학교 후배 ‘시영’과 결혼한다. 그러나 첫사랑 수아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노래를 작곡한다. 서로 다른 사람의 아내, 남편이 돼 우연히 만난 명우와 수아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극 후반 명우 ‘기억 속의 빈집’에 수아의 모습이 담기자 명우는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진다며 자신의 지난날을 다시 되짚어간다. 명우의 ‘기억 속 빈집’은 첫사랑 수아가 아닌, 함께 지난한 삶을 지나온 자신의 아내 시영이었던 것. 명우는 곡을 쓰며 자신의 추억을 다시금 떠올렸고, 그 과정에서 추억 또한 재창작했던 것이다. 자신의 기억 속 빈집의 주인이 시영임을 알게 된 명우에게 월하는 “지금 곁에 있는 이를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었음을 이야기 한다.
뮤지컬 ‘광화문연가’는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라는 마음으로 사랑도, 완성되지 못한 추억도 그 나름으로 아름답다고 전한다.
한편 막이 내리고 싱어롱 커튼콜에서 이건명과 김호영 등 주연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붉은노을’을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불러,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뮤지컬을 관람한 박진영(27) 씨는 “배우들의 열연과 이영훈의 명곡이 마주하며 깊은 울림을 전했다”며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객 최영(31)씨는 “포항문화재단 출범으로 좋은 뮤지컬을 지역에서 만날 수 있어 좋다”며 “중년 명우역을 맡은 이건명과 특유의 위트로 분위기를 압도한 월하역의 김호영의 연기와 노래가 압권이었다”고 말했다.
차재근 포항문화재단 대표이사는 “포항문화재단은 지역민들의 문화향유 기회 증진을 위해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공연 유치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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