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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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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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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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경북도민일보]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Time’을 들으며

-하우스 워밍 파티
나의 칠리안 친구 벤자민은 호텔 요리사를 꿈꾸는 청년으로 이제 막 법대를 졸업한 아내 대니엘과 함께 멜버른 사우스 뱅크에 새롭게 집을 구했다. 정사각형 거실과 깔끔한 주방, 빛이 잘 드는 테라스와 널찍한 방 두 개로 이뤄진 이 집의 월세는 1,200달러였다. 벤과 대니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방 하나는 세를 내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나는 머지않아 호주를 떠날 예정이었기에 거절했다. 결국 그 방을 차지하게 된 이들은 영국에서 온 잭과 니콜이었다. 벤은 호주 방문이 처음인 그들을 위해 하우스 워밍 파티를 열게 되었고 나와 일본인 친구 나츠토를 함께 초대했다.
테이블에는 와까뮬레와 바게트가 놓여 있었다. 벤은 칠레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며 민어를 대신하여 관자를 넣은 세비체를 내어왔다. 나츠토는 우리를 위해 고급 메실주인 초야 우메슈를 준비했고, 영국인 커플은 맥주를 두 병 가지고 왔다. 나는 준비해온 칼튼 라거 비어 열두 병과 런던 진 한 병과 토닉워터 세 병을 가방에서 꺼냈다. 내 가방의 크기 때문인지 런던 진 때문인지 영국인 커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잭과 니콜은 고향을 떠나 온지 이틀 만에 런던 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이제 막 호주에 도착한 이 대학생 커플은 테임즈 강 북쪽의 단골 가게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니콜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다며 진 토닉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런던 진 한 병을 없앴다. 그들은 아직 환전을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무언가 논의를 하더니 슈퍼에 다녀왔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고 벤과 대니가 준비한 토마토 홍합 스프가 나오기 전이었다. 테이블 위로 세 병의 진이 더 올라왔다. 각기 다른 종류의 런던 진이었다.

-잡스러운 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주 정세와 멜버른오픈테니스를 거쳐 간 대화의 물줄기는 셜록 홈즈와 해리포터와 브렉시트와 비틀즈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츠토가 나를 가리키며 이 녀석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한다는 투로 말을 해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일정부분 사실이었다. 한창 멜버른 거리에서 버스킹을 했던 나로서는 이 나라를 떠나기에 앞서 여러모로 감정이 복잡해져 있었다. 나는 거리에 스미지 못했던 날들과 그럼에도 내 노래를 들어준 몇몇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길에서 맥주를 마시지 못해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다는 변명과 이제는 더 이상 못해먹겠다는 한탄을 취한 척 말했다. 잭은 나에게 어떤 곡을 노래했냐고 물었다. 나는 비틀즈의 <Let it be>, 핑크 플로이드의 ‘Dark side of the moon’의 사운드 엔지니어인 알란 파슨스에 대한 존경으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Time’ 같은 곡들을 불렀다고 거짓말 했다. 나는 불렀던 노래와 부르고 싶었던 노래의 간극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콘셉트 앨범을 기획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가 세상에 내놓은 첫 테마는 에드가 앨런 포였다. 나의 영어 이름인 Ed는 Edgar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코는 어느새 3cm정도는 길어져 있었고, 벤과 대니와 나츠토는 내가 하는 말들이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친절하게 호응해주었다. 런던 진이 한 병씩 비워질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흐트러졌고, 벤과 대니의 집은 하우스 워밍이라는 목적에 맞게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영국 록의 현재와 프로그레시브 록의 기원에 대해, 변하고 있는 테임즈 강의 풍경과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가사에 대해, 순식간에 세계를 점령한 K-pop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영어와 스페인어와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였다. 이 잡스러움에는 내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아방가르드한 맛이 있었다. 세 병의 런던 진조차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집 주인 차례였다. 벤은 칠레에서 직접 공수해온 피스코를 두 병 꺼냈다. 레몬과 얼음을 함께 갈아서 만드는 피스코 사워와 콜라에 타서 만든 피스코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나에게는 기억이 없다. 순식간에 시간이 삭제된 것이다.

-그리고 강은 여전히 흐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벤의 집에 지갑을 놓고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인도계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기사는 욕을 하며 택시에서 나를 내쫓았다. 나는 집과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은 채로 야라 강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걷게 되었다. 휴대폰은 꺼져 버렸고, 트램은 끊겼으며, 도로 위는 조용했다. 서른이 넘어 타지에서 생활하기 시작해 벌써 이년이 지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버스킹에서 차마 해내지 못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명곡 ‘Time’을 주절주절 부르기 시작했다. ‘Time, flowing like a river. Time, beckoning me.’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이여, 나에게 손짓하는 시간이여.) 내가 스쳐지나간 풍경이 모두 강물에 실려 흘러가는 것 같았다. 농장에서 파프리카를 따던 시간과 공장에서 가구를 만들던 시간이 멜버른 대학 학생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시간과 빅토리아 도서관 구석에 앉아 소설을 쓰던 시간이 떠올랐다. 다시는 이 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언제나 흐르고 또한 흐를 것이며 되돌아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이렇다. (주저하듯 나지막이 읊조리며) ‘Forevermore, forevermore.’ 늘 그렇듯이, 늘 그렇듯이.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리고 강은 늘 그렇듯이 흐르고 있었다.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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