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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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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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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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일랜드 태생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시인 예이츠(W.B. Yeats)는 62세에 쓴 ‘비잔티움으로 가는 항해’라는 시에서, ‘팔짱을 낀 젊은이들, 연어의 폭포, 고등어 득실거리는 바다’와 같이 잉태하고 태어나서 죽는 세계, 생명이 펄떡거리는 곳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장인어른이 86세이신데 대장 내시경으로 두 번이나 용종을 다발로 떼낸 적이 있습니다. 올해도 속이 불편해서 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다니던 병원에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지금 뭔가 발견된다고 해도 그게 암으로 발전하기 전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크고 또 수술할 수도 없고 하니 검사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수긍했지만 장인어른은 마음 한구석이 몹시 허전했던 것 같습니다.
장모님께서 평소 교회에 함께 다니던 분이 있습니다. 90세인데 약간의 경증 치매도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교회를 가던 중에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져서 교회에서 목사님도 달려오고 병원 가느라 떠들썩했습니다. 일을 수습하고 난 뒤 목사님이 그분께, “이제 교회에 나오시지 말고 집에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했다 합니다. 집에 혼자 있자니 외로워서 교회 나와 또래 할머니들 만나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낙이었는데 교회도 나가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뜻이야 꼭 교회 나와야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다르게 들리겠지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영웅의 나라는 노인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네 명이 퇴장하면서 물갈이를 했습니다. 이 중 두 명은 죽고 두 명은 영웅 놀이에서 은퇴합니다. ‘블랙 위도’와 ‘아이언 맨’은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합니다. 영웅답게 스스로 그 길을 택합니다. 영화에서는 폼 잡고 죽지만 이미 ‘아이언 맨’은 너무 오래 나오다 보니 아내도 나이가 들었다고 싫어할 정도였습니다.
활 쏘는 걸로 ‘토르’나 ‘헐크’ 같은 영웅 축에 들어갈까 항상 의문이 되던 ‘호크아이’는 죽었던 가족을 되찾고 딸과 아내에게로 돌아갑니다. 방패 하나 믿고 방방 뛰던 ‘캡틴 아메리카’ 역시 군대 상관이었던 여자를 항상 잊지 못해 양자(量子) 세계를 통해 과거로 갈 때 그녀와 일생을 보내고 나이 든 모습으로 현재로 돌아옵니다. 영웅이 아닌 일반인의 삶을 택해 나이가 들어 버린 캡틴 아메리카의 마지막 모습이 사람들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느 노인처럼 점퍼를 입고 벤치에 등을 보이며 앉아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결론은 어벤저스에서 은퇴입니다.

천둥의 신 ‘토르’는 술에 찌든 배 나온 아저씨로 전락했다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납니다. 다시 이전처럼 멋있는 모습으로 돌아올지는 의문입니다. 그 막강한 자리는 이미 헤로인 ‘캡틴 마블’이 차지해버렸으니까요. 은하계를 돌보느라 바빠서 지구 돌볼 틈이 없고 눈에 광선 하나로 거대한 우주선을 반으로 쪼개버리는 ‘캡틴 마블’을, 망치만 던져 대는 토르가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제 어벤저스에서 나이 든 사람들(old men)은 모두 나갔습니다. 헐크가 아직 남아 있지만 변신을 하지 않는 헐크는 더 이상 헐크가 아닙니다. 야성이 없어져 당나귀와 수다나 뜨는 ‘슈렉’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헐크는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뭐든 때려 부수는 게 매력인데 이성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어벤저스에서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마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씁쓸했습니다. 외면하려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거죠. 시인 예이츠도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물질의 세계가 아닌 정신이 가치를 가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비잔티움이라 보았고 만년에는 그 세계로 여행하고자 했습니다. 노년에는 피와 살이 아닌 정신의 완전함이 맞다고 본 것입니다. 캡틴 아메리카도 피와 살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정신의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예이츠는 시(詩)에서 ‘막대기 위에 낡고 해진 옷 하나 걸쳐 놓은 듯 하는 늙어빠진 나는 뭐냐’고 묻습니다. 연어 떼가 폭포를 이루는 곳은 62세의 예이츠를 위한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나이는 현실이었습니다. 영혼의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면 낡아빠진 나는 아무 소용 없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노년의 정체성을 찾아갑니다. 그 영혼의 노래를 배울 수 있는 비잔티움으로 항해해 가는 것이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연어폭포의 세계가 여전히 나이 든 나의 세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가 필요 없고 그냥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세계가 있고, 청년의 세계가 있듯이, 노년의 세계가 있습니다. 과거 자신이 있었던 연어폭포의 세계에만 너무 몰입하여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2007년 개봉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남의 돈을 갖고 도망 가는 사람과 이를 쫓는 사람, 마약상 등 흉악함으로 가득한 현실을 보고 나이 든 보안관 ‘벨’은 더 이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보안관 벨도 예이츠처럼 ‘저 세계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비잔티움을 생각하면서 닻을 묶은 밧줄을 만져 봅니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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