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하이웨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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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하이웨이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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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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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민일보] 딥 퍼플의 ‘Machine head’를 들으며

-1등의 세계
“목요일에 하이웨이 스타 한다, 1등을 빌어도.”
손에게 연락이 온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손과는 거의 매일 문자를 주고받는데 반가움이나 어색함 따위는 없는 정보 전달이나 자조 섞인 욕지거리가 대부분이었다. 소통의 시간은 주로 개와 늑대 사이의, 배고픈 짐승의 혓바닥처럼 시뻘건 노을이 내려앉을 즈음이니 오죽할까. 인터넷 서점의 MD로 일하고 있는 손은 나의 20년 지기로 취직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니체나 바타이유를 전도하던 철학 투사였고, 그 자체만으로도 음울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내게 건넨 메시지를 해석하기에 앞서 당혹스러운 것은 바로 문장 속의 숫자였다. 1, 그리고 등. 이것은 자유경쟁사회 속 생존주의의 끝 간 데 없는 지향의 공간, 참여자들의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엘리시움이 아니던가.
손은 돌아오는 목요일, 회사의 장기자랑에 출전할 예정이며 본인의 무대를 딥 퍼플의 “Highway star”로 꾸릴 결심을 내린 터였다. 하아. 2019년 오월,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를 장기자랑으로 선보이겠다니. 게다가 1등을 노리고 있다니.

-장기자랑 경연대회
손과의 인연을 조금 더 보태자니 구구절절한 기분도 들지만 사실 그는 1등과 크게 동떨어진 부류는 아니다. 학급 1등, 전교 1등, 모의고사 1등. 손이 학창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은 동급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거나 시기의 대상이 되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록 정신을 가진 사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약 20년 전, 손은 내가 기타리스트로 있는 밴드에 객원 키보디스트로 활약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를 호출하면 귓가에 번개처럼 터져 나오는 음악들이 있다. 드림 시어터와 무한궤도, X재팬과 딥 퍼플, 본 조비와 미스터 빅, 헬로윈과 건즈 앤 로지즈. 그래, 머리를 아래위로 뒤흔들던 그 허망한 헤드뱅 속에서 손은 20년 정도 지난 이후 인터넷 서점의 MD가 되어 하루 종일 사각의 책과 책 속의 글자와 글자 속의 의미와 의미 속에 어떤 진실이 있을까 의심하며 살게 되리라고 생각해보았을까. 그 와중에 장기자랑에 출전을, 굳이 하이웨이 스타를, 그 곡으로 1등을 노려보겠다는 허황되고 장황하며 무모하나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예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물론 1등이지 인마.”
내가 그렇게 문자를 보낸 까닭은 우선 그에게 응원을 전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실상은 조롱에 가깝다는 것을 손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기력의 징조로 ㅋㅋㅋ나 ㅎㅎㅎ같은 기의 없는 기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완벽하게 머릿속에서 삭제되었다는 뜻이 정확하겠다.

-고속도로 스타
며칠 후 손에게 동영상이 전송되었다. 누군가 몸뻬 바지를 입고, 금발의 가발에 괴상한 가면(필시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 채 노래하는 한 TV프로그램을 표방한)을 쓰고 관객을 휘저으며 샤우팅을 하고 있는 무대 영상이었다. 약 1분여 되는 동영상 동안 가면 쓴 사내는 네 번의 샤우팅을 내질렀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삑사리(음악 안에서는 음이탈이라고 부르나, 프랑스 영화지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봉준호 영화를 가리켜 삑사리의 예술(L‘art du Piksari)이라 공식 기사화 한 것처럼 나는 이 용어를 고스란히 차용하고자 한다)를 냈다. 여덟 번 쯤 영상을 돌려보자 가닿지 못하는 고음을 턱 없이 시도하여 처절한 삑사리를 내는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희화화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관객 중 누구도 헤드뱅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웃음이나 외면하려는 몸짓을 보였던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열 번 정도 영상을 재생하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났다. 나는 울다가 웃었고, 다시 울었다. 흐느끼며 웃었다. 그런데 삑사리를 내지르는 그 부분의 가사는 더더욱 슬픈 것이어서 잠깐 살펴봐야 하겠다.
“I love it(my car) and I need it. I bleed it. Yeah, it’s a wild hurricane. Alright hold tight, I‘m a highway star. 나는 내 차를 사랑해, 내 차를 원해. 나는 이 차로 정복할거야. 허리케인처럼 말이야. 좋아, 꽉 잡아. 나는 고속도로의 스타란 말이야.”
리치 블랙모어의 강렬한 기타 톤과 마음을 움직이는 폭발적인 멜로디와 이언 길런의 샤우팅. 마초 화자가 내지르는 가사 속 ’it‘은 고속도로 스타의 질주차량, 1등 차량, 추월차량, 과속차량이 아니던가. 노래 속 화자는 속도를 갈구하고 사랑을 외치고 열정을 실현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렇게 되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불가능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즉 손이 내게 보낸 메시지, ‘목요일에 하이웨이 스타 한다, 1등을 빌어도.’와 완벽하게 같은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손의 운명은 20년 전에 예견되어 있었던 것일까. 록 정신이 투철한 1등 소년은 회사의 장기자랑에서 모두가 발라드와 랩으로 실력을 뽐내는 중에 무모하게 딥 퍼플을 소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가면 쓴 손이 온 몸을 바쳐 부르는 하이웨이 스타, 그 삑사리의, 웃기지만 슬픈,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괴상한 그 무대, 바로 그 장면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손은 참가자 9명 중 8등을 기록했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워 또 한 번 울었다.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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