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과 바틀비라는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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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과 바틀비라는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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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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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LP

[경북도민일보] 너바나의 ‘Nevermind’를 들으며

-나른함이라는 주범
한적한 일요일 오후, 나는 기타를 마주하고야 말았다. 기타를 쳐야할 어떤 이유도 없었는데 무심결에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사실 나의 시선은 늘 조금씩은 비켜나 있었지만 녀석은 줄곧 나를 응시하며 기다린 모양이었다. 좁은 거실 한편에 기타를 세워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지만 내가 음악을 포기하기로 한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부터, 더 이상 어떤 감정도 일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속이던 그날부터, 이 녀석과 나는 조금씩 서로를 비켜나 있었다. 날씨가 건조한 날에는 오아시스(습도조절장치)에 물을 담아 바디에 넣어주고, 먼지를 털거나 줄을 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기타가 문득 나른한 햇살 사이로 나를 불러 세웠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잊고 있던 오래전 친구가 유령 같은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 것이 생경해서였다. 기타는 받침대에 몸을 기댄 채 긴 목을 금방이라도 좌우로 꺾을 듯이 다소 위태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결국 그 부름에 응답하여 기타를 안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만났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오래된 친구일 뿐이었다.
-Smells Like Teen Spirit
나는 먼지를 닦고 조율을 했다. 그러자 녀석은 나의 검지를 6번 줄의 1플랫에, 새끼손가락을 5번 줄의 3플랫에 누르도록 이끌었다. 오른 손으로는 베이스 현을 가볍게 튕겨내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둥그닥.’ 두터운 진동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그 1초 정도의 소리, 둥그닥, 이후 어디로 손가락을 둬야할지 알게 되었다. 5번 줄의 1플랫과 4번 줄의 3플랫을 검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각각 잡고 오른 손을 아래위로 튕겨냈다. 다음은 6번 줄의 4플랫과 5번 줄의 7플랫, 그 다음은 5번 줄의 4플랫과 4번 줄의 7플랫.
이런 패턴으로 연주하면 대략 ‘둥그닥 (치키) 투크당닥 (치키) 둥그닥 (치키) 투크당닥 (치키) 둥그닥 (치키) 투크당닥 (치키) 둥그닥 (치키) 투크당닥’하고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

“Smells Like Teen Spirit”
이 네 개의 코드는 록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단 한 곡, 미국을 너머 전 세계에 록에 대한 인식 나아가 삶의 태도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그 곡이 아니던가.
-바틀비라는 유령
세기말적인 몽롱함과 우울감, 주류적 관습에 대한 반항과 부정의 몸짓들로 가득 찬 이 곡은 음악이 장르가 아닌 삶의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존재론적 방향을 제시했다. 이 코드의 주인인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은 한 시대의 얼굴 없는 얼굴을 담당했으나 원치 않은 삶의 궤도에 극단적 선택을 한 비운의 스타다.
그런데 문학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허먼 멜빌이 창조한 ‘바틀비’도 그런 부류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입지적인 인물이다. 고용주의 부름에 ‘I would prefer not to(나는 그렇게 안 하는 걸 선호합니다)’라는 강수를 둔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거대 자본 혹은 권력에 저항하는 성향이라기 보단 시스템 자체를 무력화시키며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한 존재의 부정성(negativity)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혹은 거부를 긍정한 채) 감옥 안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나의 기타와 나의 우상과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 나란히 떠오르는 이 오후의 단상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나의 결론은 이렇다. 감옥에서 홀로 죽은 바틀비의 유령이 커트 코베인을 통과하고 그의 곡에 열광하던 밥을 거쳐 토마스에게로 잭에게로 오스카와 대니와 레이먼드와 테드와 킴을 거쳐 유미에게로 장국영에게로 손민규에게로 그리하여 나에게로 온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잃어버린 내 청춘의 한 성향이 유령을 불러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철회할 마음이 없고, 따라서 문제는 단 하나의 양상으로 모아진다. 나는 이 유령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문제는 제법 복잡해서 당장에 결론을 내리기 힘드니 조금은 늙은 나에게 미루기로 하자. 먼 훗날의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통기타를 껴안은 채 오늘의 이 나른함과 커트 코베인의 거친 절규와 바틀비의 고독을 묘한 풍경으로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즈음의 나는 이미 커트 코베인이 되었거나, 바틀비가 되려거나, 록큰롤이 될 뻔했거나 그 무엇도 되지 못해 다시금 유령을 소환하는 한낮의 나른함에 지나지 않을 런지도 모르겠지만.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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