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나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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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나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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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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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애프터 섹스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서른여섯 해의 기압

어느 날 문득 몸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안락한 의자도 부드러운 침대도 소용없고 따듯한 물로 오랜 샤워를 마쳐도 개운치 않은. 위스키 한 잔이 필요한 걸까. 기름진 음식이라도 먹으면 나아질까. 베란다로 나가 창을 열고 볕을 쬐어도 몸은 아래로 아래로만 가라앉는 기분이다.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가. 뼈가 줄고 있는 건 아닐까. 줄고 줄어, 언젠가 만날 죽음, 그 세계를 향해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실상 그 세계는 들어가는 세계일까, 빠져나가는 세계일까, 가라앉는 세계일까, 솟구치는 세계일까, 세계라고 할 수 없는 공간일까. 공간도 되지 못하는 한 점이라면 점도 아닌 無의 영역이라면 이 무거운 기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시간은 무게가 없고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내 몸이 아닌, 세계가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내가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를 조금 더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중이라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실제로 나와 세계의 추가 균등하게 수평적일 때란 좀처럼 드물고 이 불화의 균형 속에서 분노만 내뿜자니 여간 피로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한줌의 재라도 되어야 속이 후련한 건가. 하늘은 자꾸만 낮아지고, 땅은 조금씩 솟아오른다. 나는 외압에 찌그러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 놓인다. 서른여섯 해의 기압을 받은 나는 얼마까지 견딜 수 있을까. 혹은 어느 정도에서 견디길 포기할 수 있을까.



-나른함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런데 이 무용(無用)의 세계를 인지하는 순간 허무와 동시에 강력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감각이 있다. 나는 ‘시가렛 애프터 섹스’를 통해 그러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자신의 기분을 읊조리고 있고, 나는 그들의 읊조림을 귀로 삼키고 있다. 뱉고 삼키는 순환의 고리 속에 웅크린 감각, 나른함이라 해도 좋을 나른하게 세상과 조우하는 몽롱한 느낌 속에서 당신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순간이 돌연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무겁게 내려앉는 공기의 무게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른해버리려는 것은 생의 본능인 걸까. 한 여름의 오후에 맥락 없이 이들의 노래가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이유를 나는 짐작할 것만 같다.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삶에 녹아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으로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가 내세운 자신들의 정체성, 그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이보다 나른한 순간을 상상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 레이(Man Ray)의 사진을 전면으로 세우며 에로틱한 환상을 흑백으로 포착하려 한 흔적도 보인다. 이름 뒤엔 연기가 뒤따르는데 그야말로 몽환적인 서사가 깃들어 있다. ‘시가렛 애프터 섹스’에는 이미지(Cigarettes)와 행위(Sex)와 시간(After)이 공존하고 있다.



-시가렛 애프터 섹스

느리고 여린 드럼 소리와 동그랗게 톤을 지운 키보드와 전자기타, 기본적인 스트로크로 연주하는 통기타와 단단하게 뒷받침하는 묵직한 베이스. 그중 독보적인 사운드는 그렉 곤잘레스의 목소리다. 나이와 성별을 짐작하기 힘든 이 보컬의 목소리는 어디에 근원이 되는 건지 알기 힘들 정도로 몽환적이다. 목을 길게 내뺀 마이크 앞 한 존재의 실루엣만 그려질 뿐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지우면서도 동시에 잊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텍사스 출신의 그렉이 그려내는 한 세계는 온통 흑과 백으로 이뤄진 영화다. 채도를 지운 채 심도만으로 읊조리는 이들의 음악은 공간 속을 부유하게 만든다. 그곳이 어디이건 천장과 바닥의 구분이 불필요하다. 그러다 연주가 끝나고 바늘이 더 이상 음악을 긁어내지 못하는 데에 닿더라도 잔존하는 향기에 한낮의 나른함은 더욱 짙어진다. 그러하다.

어느 날 문득 몸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진다면, 무겁게 두는 것이 낫겠다. 견디는 중에 이처럼 나른하게 세상이 나에게 오는 순간도 있을 테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라도 이 앨범을 꺼내어 바늘을 얹으면 될 것이다. 텍사스의 미풍이 먼 바다를 건너 간혹 나에게도 불어오지 않을까 상상하면서.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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