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무상(權力無常)
  • 모용복기자
권력무상(權力無常)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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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영욕 품은 저도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다
47년 만에 주민들에 반환
‘저도의 추억’ 박 前 대통령
囹圄의 몸으로 병원에 입원
섬은 주민 품에 돌아왔건만
한때 주인들은 비참한 최후
저도 보며 권력무상함 느껴
文대통령 초심으로 회귀땐
2년 여 후엔 주인 자격으로
저도의 백사장 밟을 수 있어

6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느 여염집 아낙처럼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나뭇가지로 모래 위에 글씨를 새기는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이 된 첫 해 여름휴가를 보낸 저도(猪島)에서 였다. 백사장에 새긴 글씨는 ‘저도의 추억’. 물론 이 장면은 나중에 최순실이 기획한 것으로 알려져 또 한 번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박 전 대통령에게 있어 저도가 추억의 공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저도는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에 있는 면적 43만4181㎡, 해안선 길이 3150m의 작은 섬이다. 섬의 명칭은 돼지가 누워 있는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붙여졌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작은 섬이 지닌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0년부터는 일본군의 통신소와 탄약고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중에는 주한 연합군의 탄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여름 휴양지로,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통령 별장인 청해대(靑海臺·바다의 청와대)로 공식 지정했다. 그후 9홀 규모의 골프장이 조성되고 200m 길이의 인공백사장이 조성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추억을 새긴 바로 그 백사장이다.

섬의 해안지대로 수령(樹齡) 200년에 이르는 아름드리 해송들이 울창하게 들어차 있어 풍광이 아름다우며 자연식생 또한 잘 보존돼 있어 천혜의 비경을 자랑한다. 두 대통령 부녀(父女)는 여름마다 이 곳을 찾아 휴가를 즐겼으니 박근혜 전 대통령에겐 보통 추억이 서린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섬의 풍광 못지않게 천혜의 어장을 자랑하는 저도 해안에서 고기잡이를 못하게 된 어민들의 불만은 컸다. 박정희 사후 1980년대 들어 장목면 주민들은 저도 반환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왔다. 그러다 1993년 이 곳 장목면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통령 별장에서 해제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방부 소유지로 해군에서 관리하며 대통령들의 휴가지로 이용됐으며, 주민 출입과 어로행위 금지가 풀리지 않아 주민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나 다름 없었다.

지난 16일 영어(囹圄)의 몸이 된 이후 좀처럼 보이지 않던 박 전 대통령이 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파란색 줄무늬 입원복에 마스크와 안경을 착용하고 서울성모병원에 도착했다. 어깨 수술과 치료를 위해 3개월간 입원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호송차량에서 내려 휠체어를 타고 구치소 직원들에 둘러싸여 병동으로 향하는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은 창백했다. 우리공화당을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이 환호를 보내기도 했지만 무표정했다. 오랫동안 세상에서 떨어져 있던 저도만큼이나. 이동거리가 너무 짧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박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 수감된 지 900일째 처음으로 바깥나들이를 한 이날 47년 만에 저도가 주민 품으로 돌아왔다. 행안부·국방부·해군·경남도·거제시 5개 기관은 17일부터 내년 9월 16일까지 1년간 저도를 시범 개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한 주 5일 주간에 개방되며 개방범위는 대통령별장과 군사시설을 제외한 산책로, 모래해변, 연리지정원 등이라고 한다. 저도 개방은 대통령 공약사항으로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30일 저도를 찾아 시범개방에 이어 완전개방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이로써 부산에서 가덕도~대죽도~중죽도~저도를 거쳐 거제도에 이르는 관광루트의 완성으로 지역 대표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또한 주민들도 천혜의 어장인 저도 해안에서 어로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으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겠다.

수많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저도는 온전히 살아남아 주민 곁으로 돌아왔건만 한 때 섬의 주인이던 인물들은 이제 가고 없다. 그리고 마지막 주인이 모래사장 위에 새긴 글귀마저 파도 속에 씻겨간 지 이미 오래. 인간사(人間事)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졌더라도 고작해야 십여 년. 이승만은 12년, 박정희는 18년간 섬의 주인노릇을 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4년을 다 못 채우고 지금 초라한 영어의 몸으로 병실에 누워 있다. 저도를 주민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두 달 전 이곳을 찾은 문 대통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역대 주인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들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렸을까? 만약 그가 저도를 주민 품에 돌려준 것처럼 권력을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2년 여 후에는 섬의 주인 자격으로 당당하게 저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사장에 이런 글귀를 쓸 지도 모를 일이다. ‘권력무상’.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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