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 모용복기자
살인자의 기억법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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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
조사 임하면서 혐의 전면 부인
자신 추악함 들추기 싫겠지만
수많은 국민이 기억하고 있고
살인의 추억·범인의 기억보다
강력한 첨단 과학 기억망 있어
봉준호가 말한 ‘응징’ 이제 시작
2017년 개봉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이다. 17년 전 있었던 교통사고로 받은 뇌수술 후유증으로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김병수(설경구 분). 그는 고등학생 때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를 살해한 후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을 청소하기 위해 수 십 년 동안 살인을 저질러 대나무숲에 시체를 묻어 온 연쇄살인마다.

어느날 우연히 접촉사고로 만나게 된 남자 민태주(김남길 분)가 자신과 같은 살인자임을 직감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허사로 돌아가고 오히려 딸 은희(설현 분)가 위험에 노출된다. 병수는 혼자 태주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록하고 쫓지만 기억이 자꾸 끊기는 바람에 자신도 역시 위험에 처하고 만다. 결국 은희를 죽이려던 태주를 죽이고서 자신의 모든 죄상(罪狀)이 드러나게 되지만 이전의 살인은 공소시효가 지났고 최근의 일은 치매에 걸린 상태에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교도소 대신 치료감호소에 수감되고 끝내 자살로서 ‘사람을 죽인 죗값’을 치르게 된다.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에서 연쇄살인마는 기억상실로 인해 실제와 망상을 오가는 가운데서도 녹음기와 메모를 통해 기억을 되살려내 또 다른 연쇄살인마로부터 딸을 구해낸다. 이와 달리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은 비록 극 속에서는 연쇄살인마를 잡는데 실패하지만 제목처럼 기억이 용의자를 특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제목에 ‘추억’이란 말을 끼워 넣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억하는 것이 응징의 시작’이라고. 그리고 그의 말처럼 30년이 넘도록 기억하고 추억한 덕분에 마침내 세상을 벌벌 떨게 했던 연쇄살인마가 다시 ‘살인의 추억’으로 편입됐다.

1980년대 경기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영화가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극 속의 연쇄살인마가 33년 만에 세상에 자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용의자는 1994년 처제를 성폭행, 살해, 사체를 유기한 죄로 28년 동안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이춘재다. 용의자가 특정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에 들어와 발달한 첨단과학수사 덕택이다. 올해 7월 5·7·9차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피해자들의 옷가지 등에 남아 있던 땀, 정액 등을 분석한 결과 이춘재의 DNA가 발견됐다. 비록 3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DNA는 살인자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의 유품에 남아있던 범인의 DNA가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지구상에서 오직 한 명, 바로 살인마 자신이다. 이렇듯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용의자 이 씨는 현재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어서 경찰조사를 회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부하지 않고 성실히 조사에 임하면서도 혐의를 부인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선 1급 모범수로 복역 중인 그가 화성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다면 가석방의 꿈이 날아가 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희대의 살인마로 세간에 알려지는 부담을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다음으로 20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다보니 첨단수사기법에 무지해 과거처럼 무조건 발뺌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된다. 아무튼 과학수사로 이번엔 연쇄살인마를 잡고 명예를 회복하는가 싶던 경찰은 뜻하지 않게 용의자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나서는 바람에 자칫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는 게 아닌가 좌불안석인 모양이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 용의자가 화성사건의 진범(眞犯)인지 아닌지는 좀 더 많은 증거와 분석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용의자의 DNA가 피해자들의 속옷 등에 남아 있는 이유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해명이 안 된다. 비록 살인자는 자신의 잔인한 살인행각을 추억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과학의 기억망(罔)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피해자 가족과 국민들이 기억하는 한. 망상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연쇄살인마 김병수가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려 애쓰는 것은 또 다른 살인마로부터 딸을 지키내기 위해서다. 화성연쇄 살인마도 30여 년 전 일을 기억해내려 애쓸 것이다. 자식이 아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의 기억이 과연 범인에 대한 DNA의 기억을 넘어설 지 흥미로운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기억하는 것이 응징의 시작’이라는 봉 감독의 말처럼 흉악범죄를 저지른 살인마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반드시 붙잡혀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을 죽인 죗값’을 어떻게든 치르게 해야 사회정의가 바로 선다. 이제 현대과학은 수 십 년이 흘러도 살인마의 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밝혀낸다. ‘살인의 추억’에서 몽타주를 들고 범인을 쫓던 장면은 ‘호랑이 담배 필 적’ 얘기다. 범인이 더 이상 과학수사의 기억망을 빠져나갈 틈은 없다.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많은 미제사건들이 첨단과학수사에 힘입어 살인마들이 단두대에 오를 날을 손꼽아 고대해 본다.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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