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정경, 통일신라 유물 가능성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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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정경, 통일신라 유물 가능성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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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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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석가탑 수리 기록문서 발견 41년 만에 판독
 
 1966년 석가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탑신 중앙사리공에서 발견된 종이뭉치인 묵서지편(墨書紙片)이 발견 41년만에 마침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묵서지편은 다른 유물들과 함께 수습된 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었으나 그것이 고려초기에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문서류임이 밝혀진 것은 90년대였으며, 더구나 그 개략적인 내용이 드러난 것은 2005년 9월14일 연합뉴스의 보도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묵서지편에 대한 공개 압박이 강해지자 박물관은 각계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석가탑 발견유물 조사위원회’(위원장 천혜봉)를 구성해 판독과 해석에 본격 돌입했다.
 그 사이 지난 3월9일에는 그 판독 내용 중 극히 일부분이 이렇다 할 만한 검증을 거치치 않은 채 다른 언론에 유출되어 엉뚱하게도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 중 하나로 평가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이 아니라 고려초기에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넣었다는 논란에 휘말리는 곡절도 있었다.
 27일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석가탑 발견 유물조사 중간 보고’는 연합뉴스 보도로 촉발된 묵서지편 분석 결과를 말 그대로 `중간 정리’하는 자리였다. 물론 `중간 보고’이기 때문에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 적지 않고, 나아가 이번보고에서는 묵서지편에 포함된 불경의 일종인 보협인다라니경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않았다.
 다만, 박물관측은 이번 중간 보고가 석가탑 중수와 관련되는 문건만을 대상으로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이런 중간 분석 결과 적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문서 구성
 조사단은 묵서지편 중 석가탑 중수에 즈음해 작성한 문서는 △고려 현종 15년(1024)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 △현종 15년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 △고려 정종4년(1038)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정종 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추기의 네 가지 문건으로 구성됐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문건은 제작 시기와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현종 15년과 정종 4년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나아가 특이하게도 정종 4년에 작성된 형지기는 본래는 현종 15년에 작성해 탑에 넣었던 문건을 다시 필서(붓으로 베낌)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상관 관계를 통해 현종이 살아있을 당시에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는 문건에 왜 죽은 뒤에나 붙을 수 있는 묘호(廟號)인 `현종’이라는 표기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비로소 해명됐다.
 이 중 현종 때 중수기는 불국사의 창건 내력과 역사, 1차 해체 중수와 그 내용 등을 담았으며, 같은 해 중수형지기는 이에 소요된 각종 지출과 수입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정종 4년에 작성된 두 문건은 서로에 대한 보완관계에 있음이 이번 조사 결과 드러났다. 즉, 이 무렵 2차 중수를 단행하고 그 내력을 형지기에 기록했다가 이에서누락된 부분을 보충해 `추기’라는 문건을 별도로 작성한 셈이다.
 이들 같은 해의 두 문건을 통해 2차 중수가 한창 진행되던 1036년과 1038년에 각각 석가탑은 대대적인 지진 피해를 본 것으로 드러났다. 연이은 지진 상황을 문건은 `연차’(連次)로 표현했다.
 나아가 1038년에 작성된 문건으로 `불국사탑 중수 보시 명공 중승 소명기’(佛國寺重修布施名公衆僧小名記)라 해서 석가탑을 중수할 때 보시한 사람들의 직함과 인명, 물품 목록과 수량을 기록한 것도 발견됐다.
 요컨대 이들 문건을 통해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이래 고려초에 이르러 2차례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석가탑과 불국사 창건 연대
 현종 15년에 작성된 중수기에는 석가탑이 신라시대 각간(角干) 김대성(金大城)이 경덕왕 원년(742)에 세우기 시작해 혜공대왕 대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1038년에 작성된 중수형지기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즉위년에 개창했으나 끝나지 못한 채 물러나자 태자인 혜공대왕이 끝내어 완성했다고 했다.
 혜공왕이 태자로 있다가 즉위한 것은 765년이므로 1038년 중수형지기에 근거할 때는 석가탑 창건연대는 765년 이전이 된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0년(752)에 완성했다는 기록과 김대성이 시작해 혜공왕 때 완성했다는 기록이 나란히 나열돼 있다.
 ▲무구정경의 제작연대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서 무구정경이란 문구는 모두 3번 등장한다. 그 중 두 개는 1024년 작성된 중수기에서 보이는데, 이에 의하면 이 해 2월 ●●일에 무구정경 9편(偏)과 무구정경 1권(卷)을 (석가탑) 사리공에서 수습했다가 안장(安藏)했다고 한다.
 이에 등장하는 무구정경이 신라시대에 석가탑을 창건할 때 안치한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이견이 없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때 중수기에서 `전물부동(前物不動)’이란 표현이 보이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은 사리함 안에서 수습한 사리장엄구를 다시 안장하되 처음에 있던 그대로 안장했다는 뜻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1038년에 작성된 `중수형지기 추기’에 나온다. 이에 의하면 이 해●월 ●●일에 대덕(大德.승려) 숭영(崇英)이 보협인경을 (사리공에 매)납했으며 그얼마 뒤에는 “무구정경 1권”을 어찌어찌했다고 한다.  한데 이 구절은 앞뒤 글자가 모두 지워져 있다. 따라서 무구정경 1권이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나아가 그런 무구정경을 어떻게 했다는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나아가 1024년 중수기에 나오는 무구정경과 1038년 형지기 추기에 나오는 무구정경의 관계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같은 대상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1038년에 새로 넣은 무구정경을 지칭할 가능성도 내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1966년 석가탑 해체 시에 발견된 무구정경이 신라시대 작품이라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었다. 서체로 보나, 지질(紙質)로 보나, 현존 무구정경은 현존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있기 힘들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고려초 석가탑 중수 과정
 이들 문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고려 초기 중수 과정의 대략이 밝혀졌다.
 △1024년 2-3월 1차 중수
 △1036년 6월21일 대규모 지진으로 석가탑 붕괴 위험 직면
 △같은 해 8월 손상된 일부 건축물 수리
 △1037년 ●월 연달아 지진
 △1038년 ●월 2차 중수
 ▲고대 한국어 자료의 보고
 묵서지편은 전체 분량이 110쪽에 달한다. 나아가 이에는 곳곳에 이두(吏讀)와 구결(口訣)과 같은 고대 한국어 표기가 발견된다.
 나아가 각종 한자 표기에서도 독특한 이체자(異體字)도 드러난다. 이체자란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과 뜻이 동일한 글자를 말한다.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는 “묵서지편은 이두가 다량으로 쓰인 고문서의 일종”이라고 규정하면서 특히 “기존에 구결자로 알려진 일부 글자가 이번 묵서지편에서는 이두문에 두루 쓰이고 있는 현상은 처음 발견된 것으로 문자발달사를 기술할 때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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