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경주집 화재로 이사와 군 입대 제외하곤 떠난적 없어
‘보도연맹’ 모함에 떠난 아버지 기다려라는 할머니의 유언
맞선으로 만난 아내와 첫만남… 40년 지난 지금도 생생해
한 사람의 생애는 또 하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포항시가 시승격 70주년을 맞아 市와 동갑인 1949년생 50명의 생애를 직접 찾아가 듣고, 소중한 얘기들을 기록했다. 우리 나이로 71살, 그들은 월남전에 참전 빗발치는 총탄을 피하며 가족과 고향을 가슴에 품었고, 부자집에 시집갔다고 좋아했는데 매일 20여개의 밥상을 차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 개개인의 생생한 스토리를 포항시(북구청)와 집필에 참여한 ‘콘텐츠연구소 상상’, ‘도서출판 아르코’의 협조를 받아 매주 한 분씩 소개한다.
“집집마다 마카 사연이야 다 있겠지만 우리 집안에도 특별한 가족사가 있답니다.”
포항시 북구 송라면 광천1리 727-1번지. 지금이야 도로명 주소로 송라면 보경로 192로 바뀌었지만 이 번지에서 태어나 군대 다녀온 걸 제외하고는 70년 내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원래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주 양남면이었다. 그런데 동네에 큰 불이 나서 집이 홀라당 타버리고 가족전체가 멀리 이곳 보경사 위 폭포근처 화전민마을로 이사를 와서 송라생활이 시작됐다.
논과 밭이 없어 아버지 가족들은 봄에는 산에서 나물을 채취하고, 가을에는 머루 다래를 따서 청하장과 송라장 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었고, 어릴적부터 보리밥과 조밥만 먹던 아버지는 ‘우리도 나락 밭(논)사자’라는 노래를 불렀고 결국 아버지가 총각 때 이곳 광천리로 집을 옮길 수 있었다.
생활력도 강하고 언변도 뛰어나며 덩치도 좋았던 아버지는 외동에도 맏이라 일본까지 건너가 돈을 벌어 논 20마지기를 사서 가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결혼해서 위로는 누나 둘, 그리고 저, 아래로 남동생의 2남2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가 3살인 6월 논을 매다가 ‘보도연맹’으로 모함을 받아 끌려 나간 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인물도 좋고 성실한데다 친화력도 뛰어났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기로 ‘보도연맹’으로 몰린 것이다. 막내 남동생이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 곁을 떠났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그 이후에도 계속 지루한 영향을 미쳤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후 하사관교육을 6주를 받고 임관식을 남겨 둔 며칠 전 그 일(아버지의 보도연맹)을 이유로 신원조회 불량으로 퇴교조치를 당했다. 그래서 다시 육군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27사단에 입대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맹호부대로 차출돼 종전을 앞둔 월남전에 참전해 8개월가량 지내다 귀국해 제대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이 되다보니 30이 될 때까지 장가를 가지 못했던 저에게 혼담이 들어온 것은 1977년 봄. 친척 부고를 전하러 죽장면 상옥 물샘골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인연이 닿은 분이 선을 보라고 했다. 모내기철 5월초로 짐작된다. 6남매중 막내였던 아내 김일순(63)씨는 부끄러워서인지 뒤꼍으로 둘러 들어가는데 마침 모심기를 하고 오던 길이었던지 둥둥 걷어 오린 발목만 곁눈질로 보았다. 그 순간 ‘아 내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참 신비로운 꿈을 선보러 오는 날 새벽에 꾸었다. 초가집 돌 축담이 있고 그 위에 빨간색 히루(힐) 다시 말해 빼딱구두 한 켤레가 놓여있었는데 그 발뒷굼치를 지닌 처녀가 바로 주인공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해 5월 8일 둘은 안강예식장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빨간구두의 꿈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도 아내는 빨간색 옷을 잘 입고 빨강구두를 유난히 좋아했다.
내 인생에 가장 아쉬운 것은 70년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그 6월이 오면 아버지, 어머니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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