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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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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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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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사과 익어가듯 창가에 햇살이 영글어 갑니다. 깊은 샘 같은 파란 하늘 아래로 단풍잎 산들바람에 나풀거리고 눈부시게 노란 은행잎이 후두두 떨어져 거리를 뒹굽니다. 이런 날엔 들녘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토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온몸과 온 가슴을 적시지 않는다면 가려 하고 왕연한 세상을 선사한 창조자에 대한 업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억새 머리 하얗게 물든 만목의 들판 위로 철새 한 무리 날아가고 그루터기만 남은 논두렁 저편에서 향연같이 연무가 피어오릅니다. 나뭇가지마다 붉고 노란 단풍잎, 이제 곧 낙엽 되어 툭툭 떨어지면 희뿌연 이내가 서리로 돋고 찬바람 앞세우며 살갗 시린 황량한 긴 겨울 오겠지요. 다가올 지난한 계절을 위해 곤충들은 돌돌이 고치를 짓고 다람쥐는 바삐 열매를 모으는데 나는 왜 가을마다 지나온 세월 돌려세우고 뒤돌아보며 가슴을 쳐야 하는지 핍절한 마음으로 농롱한 하늘만 한참 우러러봅니다.

솔 향기 그득한 오솔길을 오릅니다. 뒤를 따르는 어느 등산객의 휴대폰에서 구성진 옛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노래가사 한 구절마다, 한 음절 곡조마다 가슴도 저리고 온몸도 저려옵니다. 삶을 더 승화시키지 못하고, 더 열정적으로 살지 못하고, 더 노래하지 못한 날들에 대한 회한이 뇌수까지 밀려듭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숱하게 읽고 들었기에 철리라고 여겼던 ‘삶은 반복할 수 없다’라는 그 말은 틀린 말이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삶은 비슷했고 그런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만,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더 나음을 추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노니 알알이 후회로 남아 가슴을 후벼 파는 건 사랑엔 편협했고, 용서에는 야멸찼으며, 진리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더 사랑하고, 더 용서하고, 더 진리에 충실했더라면 나는 그 어느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문마저 가리운 이끼 짙은 묘비, 잡목 무성한 오랜 무덤 옆에 앉았습니다. 낙엽 썩는 내음따라 그만 온몸으로 짓쳐드는 허무… 지난날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파게 된다고 하였던가! 나는 언제쯤 죽음이라는 이 절대의 섭리에 순복하게 될까! 갑자기 한 여인이 생각납니다. “어린 자식 셋을 두고 나 데려가면 어찌합니까? 이 병을 낫게 해달라며 예배당 바닥에 쓰러져 울며 기도하던 그 여인”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머물고 있을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삶이 점점 피폐해진다면 답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비워내고 새것으로 채우되 진리는 자꾸만 되새겨 삶에 적용시켜야 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사람이 마음먹어서 못할 것도 없지만 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젠 압니다. 마음 닿는데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섭리와 순리를 거역한 우리를 지금도 신은 사랑하며 관용하고 있으니까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되어진 내 모습은 살아온 어제들이 점철된 결과물이었다는걸. 그러므로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충실하지 않는다면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또 다시 가을 들녘에 서서 탄식하리라는 것을.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코끝에 잡초 향 한 아름 부려놓고 내 뺨을 어루만지다 제 갈 길을 갑니다. 슬프지도 않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바위에 앉아 서산을 바라보노라니 핏물같이 붉은 노을이 삶에 겨워 구슬피 우시던 어머니의 붉은 눈시울 같기도 하고, 이승의 마지막 길에 신기던 꽃신 무늬 같기도 합니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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