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 이현일선생 건립정자 ‘계정’ 의 석각 발견
  • 김영무기자
갈암 이현일선생 건립정자 ‘계정’ 의 석각 발견
  • 김영무기자
  • 승인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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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수산유거지 복원 중
인근 하천변 바위서 찾아
지역사 발굴·복원사업의
중요한 실증적 지표 설정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견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건립한 계정(谿亭)의 석각(石刻).

조선 중기 영남학파 거두 갈암 이현일이 건립한 정자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발견됐다.

14일 영양군에 따르면 영양군 문화시설사업소가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을 추진하던 중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영재 영양산촌생활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최근 수산유거지 동쪽 방향 950여m 떨어진 바위에서 ‘계정’의 석각을 발견했다.

갈암은 영산서원 원장을 역임한 석계 이시명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의 둘째 아들이다.

20대 중반인 1653년 부모가 낙토를 찾아 보다 깊은 산속으로 은거하자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했다. 수산유허비부근에 ‘갈암(葛庵)’이라는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에 의하면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원천 가를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했다.

그곳에 ‘계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고 한다.

기문과 문집에 의하면 갈암을 비롯해 석계 일가는 ‘계정’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닦으며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선비들의 이상적인 삶이었던 ‘요산요수’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의 아들들이 모두 당대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다. 갈암의 경우 조정에 출사해 이조판서를 지냈다.

1672년 석계 일가가 수비를 떠난 뒤에도 그들의 유거지와 정자는 당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방문하고 싶은 지역의 명소였다.

하지만 1694년 폐비 민씨 복위운동으로 시작된 갑술환국으로 인해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 또한 탄핵돼 유배를 갔다.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회복됐다.

이에 따라 후손들에 의해 ‘수산유허비’ 건립이 추진되는 19세기 중반까지 이곳은 잊혀진 장소였다. 1865년 후손과 후학들이 ‘수산유허비’를 건립함으로써 석계 일가가 살았던 유거지는 고증됐다.

그러나 갈암이 형제들과 학문을 닦고 소요했던 ‘계정’은 1931년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서 이곳을 지나간 수산 김병종이 ‘세대가 오래 돼 초당과 계정의 위치를 알 수 없다’라고 쓴 기록처럼 그동안 그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수백 년간 잊혀졌던 갈암 선생의 정자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지역사의 발굴과 유거지 복원사업에 있어 중요한 성과”라며 “보다 실증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가 설정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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